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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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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이스맨 카잔스키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매브?"


그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그렇게 부르기 전부터 이미 현관까지 달려나와 정신없이 주위를 싸고돌고 헥헥거리며 달려들어야 할 매버릭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며 온 방문을 다 열어봤지만 그 어디에도 매버릭은 없었다. 혹시나 옷장에 들어간 건 아닌가 싶어 옷장 문도 열어봤지만 헛수고였다. 얘가 어딜 간 걸까. 바깥에 나갔을 리는 없으니 어디가 됐든 집 안에 있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문득 화장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걸 깨달았다. 잘못 들었나 했지만 분명 물소리였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 내가 아침에 물 잠그는 걸 깜빡했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는 닫혀있는 욕실 문을 열었다. 설마 그 너머에 누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였다. 그러니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사람의 형체를 보고 기절할 만큼 놀랐다.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타고난 침착함 덕분이었다. 동시에 잘 훈련된 군인인만큼 반사적으로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제압할 자세도 취했다. 그러나 역시 뭔가 좀 이상했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까맣고 동그란 머리꼭지가 어딘가 익숙했으며 뼈대가 굵지 않은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묘한 기시감이 감돌았다. 그 때 그 의문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열 일곱? 여덟?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년이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도록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차가운 욕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불쌍하게 웅크려 와들와들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순간 톰 카잔스키는 전의를 상실했다. 소년이 어째서 나신인지, 그 울멍울멍한 녹색 눈동자가 왜 늘 보던 그 초록색 눈동자와 닮아있는지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 찬물을 잠그고 커다란 타올을 꺼내 소년의 몸을 감쌌다. 네가 누구냐고 물을 마음따윈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아이가 느낄 추위만이 걱정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몸의 떨림은 점차 잦아들었고 충분한 기다림 끝에 소년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 아이스..."

"!"


소년은 제 별칭을 알고 있었다.


"나,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 말을 하며 제 소맷자락을 붙잡아오는 소년의 모습은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굉장히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모습. 아이스는 직감적으로 그 불안의 원인이 저일 것임을 깨달았다.


"나, 나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왜..."


혼란스러워 하며 말을 늘어놓던 소년은 하던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아이스의 눈치를 보았다. 상황파악을 하느라 잠시 심각해진 것 뿐인데 그 굳어진 얼굴을 보자 소년은 다시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하지도 않은 잘못을 빌었다.


"흑...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나, 나 버리지 마아......"


아, 설마 설마 했지만 이쯤 되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톰 카잔스키는 눈치가 빠른 편이고 여러가지 정황과 이 아이의 말이 전부 일관된 단 하나의 답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버리지 말라고 매달릴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뿐이다. 아니,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아빠 없을 동안 잘 지내고 있으라고 하고 나갔는데. 꼬리를 흔들며 제 뺨과 손을 핥아주던 내 강아지가 갑자기 사람이 됐다니.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보다 그에겐 그의 안쓰러운 강아지를 안심시켜주는 게 더 중요했다. 의심은 필요없었다. 비단 제 감 뿐만이 아니라 세포가, 온 몸의 감각이 이 아이가 매버릭이 맞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했는데도.


겉모습이 바뀌었으니 버려질 거라 생각한 건지. 아이스는 못내 입맛이 썼다. 그렇게 사랑해주려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믿을만한 확신을 주지 못한 것 같아서. 상처가 많은 아이인데, 내가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무의식중에 손톱이 살을 파고들만큼 세게 주먹을 쥐던 그는 이내 옷이 젖든 말든 소년의 몸을 꽉 끌어안아주며 말했다.


"매브, 내가 말했잖아. 널 버리는 일은 절대 없어. 그 어떤 경우에도."





*





날짜를 기억할 수 없는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검은 늑대 한 마리가 흔한 펫샵의 우리 안에 갇혀 유리로 된 벽면 밖으로 먼 하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은 생기없이 죽어있었고 그 몸에는 무수한 학대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는 늑대였지만 작은 몸집 때문에 혈통이 좋은 늑대개 쯤으로 여겨져 여러 인간들의 집을 전전했다. 순종이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에 아름다운 녹색 눈을 가졌으니 그를 탐하는 인간들은 많았다. 소유하려 하고 과시하려 했으며 복종시키려 했다. 그러나 늑대는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는다. 그를 애완견 취급하려는 인간들과의 마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원치 않는 입양과 파양을 계속하다 오게 된 곳이 이곳이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조용히 죽고 싶었다. 그 때 출입문에 달려있는 종이 짤랑이는 소리가 났다. 물론 관심없었다.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인간이 말하는 대상이 아무리 들어도 저를 가리키는 듯 했다. 그는 저조차도 관심 없는 제 처우에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소란이 일었다.


"-많이 다친 것 같은데요. 저대로 둬도 괜찮습니까?"

"안 죽어요. 죽어도 상관 없고. 어차피 팔리지도 않는 거."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살아있는 생명인데."

"뭐 어쩌라는 겁니까. 손님이 살 거 아니면 가세요."


같잖은 정의감인가. 그것도 아니면 알량한 동정심. 뭐든 필요치 않았다. 이제껏 수없이 겪어봤고 동일한 결말을 맞이했다. 저 자라고 특별히 다를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매버릭은 이미 너무 지쳐 있었다. 더는 인간들 틈에 치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게 주인의 말에 기분이 상해 얼른 나가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불손한 태도가 그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건지 뭔지 그는 홱 돌아서서 제가 있는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가게 주인을 노려보며 이 문 열라고 말했다. 그 기세가 퍽 매서웠다. 인간치고는 굉장한 기백이었다.


"사실 거 아니면..."


반쯤 기가 눌린 채로도 무어라 반박을 해 보려던 가게 주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를 보고 허겁지겁 하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그 덩치와 위세에 압도당한 모양이었다. 눈빛이 꼭 한 대 치기라도 할 것 같았는데 뚜벅뚜벅 카운터로 다가간 그는 이윽고 차분히 품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휙 내던졌다. 모욕감을 주려고 일부러 던진 듯 했다. 가게 주인의 얼굴이 꽤 볼만했는데 아뿔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구에게도 팔려가고 싶지 않았다. 곧 철창으로 된 문이 열리고 그 인간이 다가왔다. 매버릭은 으르릉거리면서 경계태세를 취했다. 여차하면 목을 물어버리려고 했다. 감히 자길 사가려고 하면서 겁도 없이 우리의 문을 활짝 여는 멍청한 인간이니 그렇게 죽어도 할 말이 없으리라. 그 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제게 내밀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구원의 손길이란 걸 몰랐다. 매버릭은 무섭게 이를 드러냈지만 그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나랑 같이 가자."


그러나 더없이 선해 보이는 그 얼굴을 믿기엔 매버릭은 이미 너무 많은 인간들의 민낯을 본 후였다. 극도로 흥분한 매버릭은 순간 공격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손을 물어버렸다. 제대로 문 것은 아니고 이빨만 스친 정도지만 금새 피가 났다. 아, 뜻하지 않았던 것이기에 약간 당황하였으며 동시에 학습된 보복에 대한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인간들은 갖가지 이유로 자신에게 폭력을 퍼부었다. 시키는대로 하지 않아서, 주인에게 대들어서, 지금처럼 이렇게 자기들한테 상처를 입혀서. 매버릭은 이제 그가 자신을 때릴 거라고 생각했다. 단정하고 반듯해 보이는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을 때릴 거라고. 그러나 그 따뜻한 손은 굳어있는 매버릭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을 뿐이었다.


"정말 괜찮아. 다 괜찮아질거야."


그 순간 매버릭은 조금 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믿을 수 없게도 저를 안아들고 가게를 나섰다. 늑대치고 작을 뿐이지 절대로 품에 안고 다닐만한 사이즈는 아니다. 거의 송아지만한 개를 안고 있는 남자에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거북하고 수치스러워서 몸을 버둥대자 그가 말했다.


"응? 어디 불편해?"


그래, 쪽팔려 죽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와 저는 말이 통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불편하다는 듯 계속 몸을 뒤틀며 그의 옷 위를 박박 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내 그는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아, 소리를 내며 저를 내려놓았다.


"상처가 아파서 그러지?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그거 아니거든? 이까짓 거 아무렇지도 않거든?


제 불만을 읽을 수 없는 그는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미끈하게 잘 빠진 세단 하나가 앞에 와서 섰다. 지난 경험으로 보아 이 인간 또한 꽤나 잘 사는 집안의 자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 이거 타고 아빠랑 집에 가자-"


누가 아빠야? 누가?


그 낯간지러운 호칭에 제가 경악하거나 말거나 그는 저를 번쩍 들어 차 뒷좌석에 앉았다. 아까부터 생각하는 건데 이 인간 힘이 장사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그 때 그가 운전기사에게 무어라 말했고 차는 곧장 방향을 틀었다.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닌 동물병원이었다. 이, 어떻게 나를...! 이건 늑대로서의 프라이드 문제였다. 아무리 아파도 이딴 말티즈나 다니는 병원 따위는 가지 않는단 말이다! 으르르- 매버릭은 이빨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매버릭을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안 무서워해도 돼. 네가 아픈 건 안 할 거야. 그냥 괜찮은지 잠깐 보기만 할 거야."


이 인간은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





그는 가게를 떠나기 전에 제게 따로 이름이 있는지를 물었다.


"매버릭이요? 이름이 뭐 그렇습니까?"

"아, 전 주인이 붙인 이름이라서요..."


가게 주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제 이름이 마음에 안 드는 듯 했다. 솔직히 저도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름은 스스로 지을 수 없는 거니까 뭐. 그리고 인간들이 뭐라고 부르든 딱히 흥미 없기도 하고. 그런데 단순히 괴짜같은 이름이라 싫어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악의적으로 고약한 이름을 붙여준 인간에 대한 순수한 분노였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그래도 제 이름을 바꾸지는 않을 거라 했다. 앞으로는 자기가 애정을 담아 불러 주겠노라고. 그렇게 '매브'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참 여러모로 이상한 인간이었다. 저는 부를수도 없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다던지, 답을 들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어떤 게 좋냐고 물어본다던지, 일일히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다. 제가 마지못해 여러 개 중에 하나에 앞발을 올려놓으면 마치 걸음마 뗀 아기를 본 것처럼 기뻐하고 기특해했다. 우리 매브는 천재인가봐- 이딴 팔불출같은 소리도 잘 했다. 빈말로도 못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무표정할 때는 좀 차갑고 무뚝뚝해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바보다.


제가 인간의 주머니 사정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지만 금전개념도 아주 흐리다. 대체 얼마나 잘 사는 집 도련님인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물 쓰듯 쓴다. 그게 본인의 사치에 쓰이는 게 아니라 제게 필요한 것들을 사는 데 쓰인다는 게 의외지만. 아니, 애초에 저는 그렇게까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니 그냥 그 인간의 자기 만족이려니 했다. 굳이 따지자면 비싼 취미생활 정도?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필요가 있는가? 그에게 저는 아무리 좋게 쳐줘봤자 고작 애완견일 터인데. 애완동물한테 쏟는 친절이 과하다. 재력을 과시하고 싶은 건가? 그렇다기엔 집에 누가 찾아오는 것도 잘 못봤는데. 그것들 하나하나가 다 관심과 애정이었음을 깨달은 날은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할 지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 속이 술렁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도.


다 제쳐두고 그냥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는 소파에 앉아 독서를 하고 저는 그 옆에 몸을 둥그렇게 말고서 사락사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따사로운 한낮의 한 때. 그는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이라 모든 일을 조용히 물 흐르듯 처리했다. 그런 그가 묘하게 활발해지는 게 제 앞에서만이라는 걸 알게 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톰 카잔스키. 아이스맨, 아이스로 더 많이 불린다는데 그런 사람이 저한테는 우리 강아지- 라고 부른다는 걸 다른 사람들은 알까. 물론 처음에는 그 호칭에 기겁을 했었다. 강아지라니, 강아지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치욕스러운 호칭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강아지라고 부를 때마다 한 품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저를 꼭 껴안고 사랑해, 라고 속삭여주는 것에는 속절없이 마음이 허물어지고야 마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자연스럽게 그에게 스며들어갔다. 아무 조건 없이 무한한 사랑을 퍼부어주는 존재에게 버틸 재간이 없었다. 점점 그가 좋아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함께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지독히 아쉬웠다. 처음으로 제가 짐승인 것이 한스러웠다.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도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톰과 바깥에서도 함께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처음엔 막연한 바람이었다가 얼마 후에는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워야 하는 그 시간들이 갈수록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침에 집을 나서는 그를 붙잡고 떼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멋대로 굴었다가 혹시라도 그에게 버려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준 사랑의 크기만큼 그 사랑이 식었을 때 그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더 이상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지 않는다면,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는다면,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며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린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왔다. 이제는 그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괴로워 저도 모르게 낑낑거리자 그가 깜짝 놀라며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그는 항상 그렇게 말을 걸어왔다. 동등한 인격체를 대하는 것처럼. 그 말에 답해줄 수 없는 것이 이렇게나 아쉬워질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제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매브, 난 널 버리지 않을거야. 절대로. 하고 속삭여주었다. 속으로 제발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랐다. 이제 그에게 버려진다면 살아갈 자신이 없었기에.





*





여느 날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배웅해주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돌연 심장이 쿵 하고 요동치더니 온 몸의 피가 타는 듯한 작열감에 휩싸였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고열이 전신을 덮쳤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는 모르겠다. 눈 앞에 뿌옇게 보이는 게 제 팔임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제 몸을 더듬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인간 남성의 몸이었다. 어색한 걸음걸이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거울에 비춰 본 제 모습은 짐승의 몸이었을 때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분명히 인간의 몸이었다. 어째 좀 미성숙해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인간의 몸. 희미한 희열이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짐승이 인간이 되었다고 믿기나 하겠는가. 설령 믿어준다고 해도 괴물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제서야 매버릭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제 욕심이 얼마나 허황되고 주제를 모르는 바람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낯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에게 혐오와 경멸을 받고 내쫓길 거라 생각하니 두려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그 옆에 있을 수 있다면 평생 자존심도 없는 개새끼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늑대로서의 자긍심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그의 다정함을 잃고 싶지 않았다. 울어서 그런 것인지 또 다른 변화가 있을 예정인지 또다시 열이 올랐다.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





매버릭이 성체임에도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았기 때문임이 드러났다. 아이스는 분노로 이를 갈았으나 곧 매버릭을 꼭 껴안아주며 감정을 다스렸다. 은밀히 조사한 결과, 매버릭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인반수라기에는 애매하지만 결론적으로 사람과 짐승의 형상을 오갈 수 있는 존재들. 매버릭의 경우에는 자신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이는 어릴 때 부모님이 건 암시 때문이라고 했다. 매버릭은 처음에는 수인화 조절도 잘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능숙해졌고 점차 잊고 있던 기억들도 돌아왔다. 부모님은 매버릭이 세상의 풍파를 맞지 않고 자유롭게 야생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셨다는데 그럼에도 어떠한 조건이 맞으면 저절로 암시가 풀리도록 해 놓으셨다고 했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 매버릭은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





하염없이 울던 매버릭을 겨우겨우 달래서 욕실에서 데리고 나왔던 그 날, 왜 추운데 거기서 그러고 있었냐는 물음에 열이 나서...너무 뜨거워서 그랬다고 하는 걸 듣고 아이스는 제가 더 빨리 오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급히 해열제를 찾았다. 분명 여기 어디쯤 있었던 것 같은데... 다급하게 서랍들을 뒤졌지만 좀처럼 찾는 약이 눈에 띄지 않았다. 정신없이 약을 찾고 있는데 어느새 그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셔츠자락을 잡아당기는 손이 느껴졌다.


"매브?"


침실에 있지 왜 나왔어.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매버릭의 울먹울먹한 눈동자를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새 불안해서 나왔구나. 매버릭은 꼭 버려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말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 아이스, 나...나 진짜 안 버려...?"


그 순간 아이스는 해열제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님을 깨달았다. 손에 들고 있던 약들을 놓아버리고 그대로 뒤돌아 매버릭을 끌어안아주었다. 그가 불안하지 않을만큼 강하게 끌어안아주고 몇 번이고 그가 듣고 싶은 말을 되풀이해주었다.


"당연하지. 절대 안 버려. 약속했잖아."

"흐으......"


그제서야 안도 섞인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한 쪽 어깨가 축축히 젖어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아이스는 매버릭의 작은 뒤통수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렇게 눈물이 많다니.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늘은 또 얼마나 놀랐을까. 여전히 상처 많은 아이 같은데. 이런 너를 내가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매브,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맹세해."





*





매버릭은 인간의 몸을 얻고 나서야 아이스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호적도 없는 유령같은 제게 번듯한 새 신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쉽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는데. 정작 아이스는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넘겨버렸지만. 그는 갑작스런 변화에 제가 혼란스러워 하지 않도록 이전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써주었다. 변함없는 배려와 온기. 자상함. 계속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이 온 몸을 잠식했다. 단 한 가지, 더 이상 우리 강아지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은 좀 아쉬웠지만. 그게 애정이 식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뭐라 투정할 수도 없었다. 제가 조금 어려 보여도 성인이라는 것을 안 아이스는 저를 어엿한 어른으로 대접해주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매버릭은 역시 좀 시무룩했다. 그 말을 들을 때 가장 예쁨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논외, 비교불가) 다 큰 사내놈이 강아지라고 불러달라 하면 징그럽겠지, 생각하면서도 매버릭은 좀처럼 그 애칭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늑대 모습일 때만이라도 그렇게 불러달라고 해 볼까. 원한다면 하루종일 그렇게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나 매버릭은 이내 제 양 뺨을 쫙쫙 때렸다. 괜히 칭얼거려서 아이스가 질릴만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제 그가 주었던 애정에 미약하게나마 보답을 하고 싶었다. 무엇으로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그는 자신을 절망의 늪에서 구해주었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며 사랑으로 보살폈다. 매버릭의 삶은 그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은인에게 보은을 하고 싶었다. 집에서 밥만 축내는 식객이 아닌 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매일 설거지하다 접시나 깨먹는 일의 반복이었다. 아무래도 매버릭은 집안일에는 재능이 없는 듯 했다. 아이스는 이런 거 안 해도 된다고 극구 말렸지만 매버릭은 고집을 부렸고 결국 피를 보고서야 그만두게 되었다. 매버릭이 다친 걸 보고 아이스는 처음으로 아주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아이스는 화내면 상당히 무서운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매버릭은 잔뜩 위축되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속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기운이 빠져 몸이 축 쳐졌다. 고개라고 빳빳이 쳐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 매버릭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돌리며 아이스가 말했다.


"매브,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그 다정한 목소리에, 스스로의 한심함에 또 눈물이 나왔다.


"미안...미안해..."

"맵, 혼내는 거 아니야. 울지 마. 응?"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 너는 너무 다정하다. 다정함이 지나쳐서 독이 된다. 나를 달래주는 그 다정함에 질식해서 죽어도 좋을만큼...너를 사랑한다.





톰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비밀.

부모님이 건 암시의 해제조건은 이것이었다.



죽음까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때. 그것을 자각했을 때.

-그 때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거란다.















매브아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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