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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4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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햎 닫혀있는 동안 심심한 화과자들 조금이나마 볼 거 있으라고 백업해둔 거 재업함.. 최종 수정하기 전 번역이라 오역/비문 많을 수도 있음


0. 서문

이 서문을 쓰기 위해, 한 가지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한 1년 전쯤, 한 음반 회사의 책임자는 내게 자전적인 산문집을 출판하자고 했습니다. 나는 계속 생각을 하며 소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이 십여년 동안, 받았던 잡지 회사의 인터뷰 요청은 수 백 번이 넘었고, 물을 수 있는 것은 다 묻고, 저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이후에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지난 일을 다시 꺼낸 것은 5년 전 제가 타이베이 시립 운동장에서 첫 공연을 한 이후입니다. 군중들이 저에게 준 충격을 오랫동안 가라앉힐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음반사에 제안 했습니다.

"전 이 자전 소설의 모든 수입을 "爱的连线" 장학기금으로 돌려주고 싶습니다, 이게 제 마음이에요."

소설로 자서전을 쓰고자 한 것은 제 과거의 모든 것을 공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읽으면서 다시 재미를 되살리고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어떠한 선택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一. 泰享村的小克星 태향마을의 작은 극성

'옛날'이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있어, 마치 신비로운 시대와 같아, 너무 높아 닿을 수 없었고 나를 황홀하게 하였다. 나는 대포 서북지역의 태향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먼저 산파가 집에 와서 아이를 받고 그제서야 아버지가 나를 병원에 데려가 등록하고, 출생증명서를 받아왔다. 족보대로라면, 내 이름은 '유복영'이고, 가족들은 모두 나를 '영자荣仔'라고 불렀다. '유덕화'는 후에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바꾼 이름이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두둑과 논밭, 푸른 물과 푸른 산, 이것들이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나의 조부님 댁은 '品'자 모양의 시골집이었는데 좌우 양쪽에 주옥이 있고 그 사이에 사당이 있었다. 사당 안에는 하나의 대련과 조상님들의 초상화가 일렬로 걸려있었다. 매번 나는 까치발을 하고, 머리를 높이 들어올려야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가운데에 있는 초상화 하나를 가르키셨다.

"보렴, 이분이 너의 조상님이란다, 조정에서 벼슬을 하셨지."

나는 "오"하고 소리를 길게 끌으면서 감탄했다. 할아버지는 만족해하셨고 하얀 수염을 한 줌 꼬으며 웃으셨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매우 많으셔서, 나도 그가 몇 살이셨는지 잘 모른다. 그의 얼굴은 온통 검버섯과 깊은 주름살 투성이었다. 나는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몸에 매달려 작은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의 주름을 따라 이마에서 눈썹 사이, 눈꼬리, 입가를 계속 왔다갔다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손자는 장래에 커서 분명 유명한 화가가 될 거요!"

말로는 아쉬워했어도, 속으로는 기뻐하셨다. 할아버지의 환심을 사기위해, 나는 때때로 한두 장의 그림을 그렸다. 나는 무지개를 가장 즐겨 그렸는데, 무지개가 가장 그리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한 손에 다른 색의 색연필 7자루를 쥐고 반 원을 하나 그리면 된다. 단순하고 편리했다.


화가 말고도, 나는 말썽 전문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난 태향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작은 극성 (克星 극성 : 적수, 어려운 상대)'이라고 불렸다. 나의 아버지 같은 어른도 화를 면할 수는 없었다. 범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폭풍이 치던 밤, 나와 사촌 형, 동생 그리고 한 동네 아이까지 각자 헌 신문지 한 묶음과 낚시줄 여러개를 찾아왔다. 난 칼로 인형 도안 한 장을 잘라내고 각각 인형의 사지에 긴 낚시줄을 매달아 다시 종이를 검게 칠했다. 네 사람이 각각 낚시줄 한 쪽 끝을 잡고, 나뭇가지의 끝을 숨겼다. 바람이 윙윙 불고, 들개가 짖었다. 나는 손바닥을 문지르며 기회를 차분히 기다렸다. 반 일각(7.5분)쯤 지나자, 멀리서 마침내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저게 누구지?" 내가 조용히 말했다 .
"너무 어두워서 잘 안보여."
"누구든 간에 이렇게 오래 기다린 후의 첫 사람이니, 놀래켰다가 다시 말해!"
"그래, 계획대로 해!" 우리는 각자 손짓을 했다.

뚱뚱한 사람이 점점 다가왔다. "하나, 둘, 셋! 당겨!" 네 사람이 손을 당기자, 검은 인형의 그림자가 즉시 지면에 드리워졌다. 뚱뚱한 사람은 놀라 혼비백산하여 순식간에 도망쳤다. 나는 갈채를 했고  친구는 승리의 손짓을 보냈다.

집에 돌아가 문이 열리자, 아버지께서 그럴듯하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정말 문제가 있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당신이 노안이라 잘못 본 거겠지!"
"어떻게 잘못봐? 이렇게 큰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니까." 그는 손짓을 했다.
"두 눈동자가 번쩍거렸어! 틀림없어!"
"헛소리야, 태향마을은 풍수가 좋아서, 이제까지 귀신이 나타난 적이 없어!"

나는 문 뒤에 서있다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단숨에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진 채로 들어가자, 아버지께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시더니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荣仔, 앞으로는 집에 일찍오고 산길은 적게 가는 편이 좋을 거야. 조심해, 함부로 뛰어다니지 말고." 그러고나서 돌아서서 어머니께 계속 얘기 하셨다. "잘못 본 게 아니야, 확실히 봤어."

난 침대 위로 뛰어올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어서 크게 웃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나는 이 작은 비밀을 잘 숨기기로 결정했고, 할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6년, 5세가 되던 해였다. 그날은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았고, 밖에는 아침부터 일찍 이슬비가 내렸다. 이런 날씨에는 산에서 달팽이를 잡는 것이 가장 좋았다. 세수를 하고 만두를 아무렇게나 집어 먹고 한쪽 발을 밖으로 딛는 순간, 어머니께서 나를 불러 세웠다.

"荣仔! 너무 심하게 놀면 안돼! 곧 큰 비가 내릴거야!"

나는 지체할 틈 없이 달아났다.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이 어두워지고 날이 저물자 천둥 소리가 몇 번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촌 형 둘과 작은 통 하나를 달팽이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의 전리품은 내 작은 주먹만한 거대한 달팽이한 마리였다. 난 아직 흥이 가시지 않아 한 손의 흙을 털며 사촌 형에게 손짓했다.

"우리 뒷산에 다시 가서 더 파보자, 분명 더 많이 있을 거야! 라고 말했다.

우린 몇 걸음 더 가지 못했는데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주저하고 있는데,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돌아보았다. 큰 아버지께서 허둥거리며 달려오시는 걸 언뜻 보니, 얼굴 빛이 어두웠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손에 들려있던 작은 통을 빼앗아 땅에 던지며 소리치셨다.

"너희 아직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 荣仔! 할아버지께서 차에 치여 쓰러지셨어!"

내가 반응할 겨를 없이, 큰 아버지께서 이미 나를 끌고 달리셨다. 몸을 돌리면서, 그 거대한 달팽이 위에 발을 디뎠다. '우직'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달팽이 껍질이 갈라졌다. 황급하게 뒤돌아보니, 달팽이의 몸은 이미 짓밟혀 고깃덩이가 되어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커졌다. 지금까지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먼 지 몰랐다. 어둠 속에는 오직 백색 전광 하나와 광분한 네 명의 그림자만 보였다.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品”자 모양의 집에는 오직 사당 안에만 희미한 황등이 빛나고 있었다. 난 큰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사당 안에 계셨고, 두 눈엔 붉은 핏줄이 서있었다. 그 후 나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사당 중앙에 있었는데, 나무판 위에 누워계셨다. 몸을 덮은 흰 천이 그의 얼굴까지 완전히 덮고 있었다. 5살의 나는, 마음 속에 망설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죽음"이라는 걸까? 어머니가 나를 품에 안아주실 때까지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 할아버지는 대형 화물차에 치여 돌아가셨어."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큰 누나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사당에는 그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나는 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나는 얼굴을 반쯤 가린채 할아버지께서 네모난 긴 나무 관에 들어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중얼거리셨다. 이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앞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걸까? 옛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나는 이 문제를 되풀이하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을 해봐도, 여전히 긍정적인 답은 나오지 않았다.


"荣仔! 荣仔!" 누가 나를 부르는 거지? 나는 머리를 들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라고 손짓하셨다. 갑자기 사당 전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작은 주먹을 단단히 쥐고, 아버지 앞으로 걸어가자 바로 옆에 네모난 나무 관이 놓여있었다. 언제 나무 뚜껑을 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긴 못 하나를 건네주셨다

"荣仔, 너는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란다. 속례대로라면 그가 돌아가신 후 관의 마지막 못은 네가 박아야 해."

나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 못을 받아 손바닥에 올려놓았는데, 아주 무겁고 내 손바닥 만큼이나 길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나무관 위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히 보고싶었으나, 아버지께서 이미 한 손으로 나를 안아 올리셨다. 그는 내 손을 열어 망치 한 자루를 쥐어주었다. 나는 못을 나무 뚜껑의 왼쪽 아래에 두고 눈을 들어 아버지를 보았다. 그는 끄덕이며 나에게 망치를 들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힘껏 망치로 못을 내리쳤다. 한 번 또 한 번, 점점 더 무거워지는 거 같았다.



2. 从不浪费吃喝玩乐
여태껏 먹고 마시고 노는 시간을 낭비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용사'이셨다. 이 십여 년 전 "도시로 이사 가야겠어."라는 한마디로, 우리 가족 8명을 모두 도시로 밀어 넣었다. 元义子의 '용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의 정신에 따라 아버지는 친척과 친구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고향 사람들의 눈초리에 불구하고 가겠다고 하니 그 의지가 완고한 돌과 같았다. 그의 이러한 수는 모두에게 경악보다는 분노를 가르쳤고, 비난받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매일 한 무리의 부녀자들이 우리 집 앞을 기웃거리고 황당무계한 논리를 펼쳤다. 그들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웃는 척했다

"에이, 아주머니 도시에 가서 살면 풍경이 참 좋겠어요!" 정말 짜증이 났다.

그리고 나도 갑자기 친구들을 잃었다. 아이들의 엄마들이 모두 나와 함께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배신자! 거짓말쟁이!"

마을의 일부 무료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나와 누나들을 욕했다. 나는 매우 화가 났다. 한 번은 정말 화를 참지 못해서 돌멩이를 주워 그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다. 그들의 머리가 돼지처럼 부어오를 때까지 때려서야 마음이 풀렸다.

가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만약 아버지의 이러한 사상신조(思想新潮)가 아니었다면, 아마 난 유씨 가문 직계로 일찍이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차(茶)가 오면 손을 뻗는 십이소. 좋은 경치와 풍류를 즐기다가 한가해지면 한 곡조 뽑는 유희 인생을. 미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토황제가 아니라, 용사일 뿐이었다. 용사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울 운명이고, 그의 자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머리 맡에 있는 테이블에서 그림책 한 권을 손이 가는대로 집어왔다. 팬들이 지난 번에 촬영장에서 직접 내게 전해준 것이었다. 한 페이지를 펼쳤는데 전부 옛날 사진들이었다. 시대 복장, 무대 의상, 스틸컷, 일상 사진...... 잠깐 ── 이게 뭐지?
나는 방금 넘긴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자세히 보니, 뜻밖에도 어릴 때의 흑백 사진이었다. 대략 6세쯤 되어 보이는 내가 누나의 손을 잡고 작은 책가방 하나를 들고 있다. 사진이 누렇게 바래서 나조차 어디서 찍은 것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이미 우리 집이 대포를 떠난 후 다이아몬드 힐에서 살았던 때였음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때였을 거다. 작은 손은 누나의 손을 꽉 잡고 있지만, 한 쌍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 무의식 중에 나타난 표정은 마치 나와 우리 가족의 오랜 관계를 나타내는 것 같다. ── 마음은 통하지만, 친하지는 않은.


난 어렸을 때 집에서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가 숙제를 하고 그 후 아무 걱정 없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스로 즐거움을 얻었다. 어머니께선 내가 문제가 있다고 걱정하셨을 거다. 나를 불당으로 데려가 기도를 드렸고, 이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쓰디 쓴 향로잿물을 무수히 많이 마셔야 했다. 하지만 신수를 마셔도 입을 열지 않고 여전히 과묵해서 어머니는 암암리에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나는 누나 셋,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 집에 모두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있는데다가, 아버지는 잡화점과 빙실(冰室)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하루 종일 사람들이 오가고, 시끄러운 것이 마치 유원지 같았다. '주변 환경은 사람의 기질을 변화시키고, 수양은 사람의 자질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난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원인을 말할 수가 없다. 가족들과 싸운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니었지만 집에 돌아가자마자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잡화점이나 빙실에서 일을 도왔는데 모두가 협업하여 온 가족이 즐거웠지만 온종일 내가 그들과 나눈 대화를 합쳐도 서른 자가 넘지 않았다.


그 해에 나, 둘째, 셋째 누나 그리고 동생은 모두 황대선 초등학교에 다녔다. 나와 둘째 누나는 오후반을 함께 다녔기 때문에, 매일 그녀가 나를 데리고 등교했다. 나는 항상 그녀의 앞에 서서 이것저것 살피고 돌멩이나 사이다 뚜껑 따위를 차고, 차면 찰수록 멀어져서 그럴 때마다 매번 그녀는 크게 소리쳤다.

"荣仔, 뛰지마!" 하면서 나를 돌아보도록 했다.

학교를 마치면, 그녀가 또 나를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갔다. 두 남매는 여태껏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 혹은 교실에서 무슨 화를 입었는지를 교환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잔소리도, 하소연도 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철저히 그렇게 했다.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지금 나는 집에 돌아가면 말하는 법을 배운 앵무새처럼 말을 끝없이 늘어놓고, 떠들석한 곳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촬영을 하면서 지칠 때도 있지만 집에 돌아가 누나와 조카를 만나게 되면, 나는 차라리 두 시간 정도의 수면시간을 희생하고 그들과 끝내 달라붙어 있는다. 다만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처럼 더이상 나와 말을 하지 않는다. 때로 거기에 앉아 조카들이 말하는 것만 들어도 재미가 무궁무진하다. 3세에서 5세까지 되는 아이들이 모두 미간을 찌푸리고 앳된 목소리로 "에이, 짜증나!" 라고 말하면 나는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도 걱정을 한다니?


나는 여태껏 먹고 마시고 노는 데 속한 세월을 낭비한 적이 없다. 아마도 좀 총명했던 탓일거다. 공부하는 것 외에도, 나의 시간은 모두 운동장 위에 놓여있었다. 매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거의 모든 동아리에서 유덕화의 신청서를 받았다. 서예, 축구, 농구, 배구, 배드민턴, 탁구, Novuss, 트램펄린, 브리지(카드놀이), 수영, 높이뛰기, 멀리뛰기, 달리기 및 모든 육상 경기들까지... 수업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이 모두 빽빽히 차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왜 해가 이렇게 일찍 저무는 건지 미워하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엔 공부를 하고 수업이 끝나면 말썽을 부리고 숙제를 마쳤다. 나는 이런 학생이었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악도 아닌,  포기하긴 아쉽지만 가르치는 건 힘이 드는, 선생님에게 두통을 선사하는 데 가장 뛰어난 학생.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문이과 선택을 앞두고 모든 학생들은 걱정으로 가득했으나, 나는 일찍부터 속셈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 그것에 대해 논의하도록 했다

"유덕화, 너는 무슨 과를 선택할 거니? 너의 문학은 항상 괜찮았지."
"이과를 선택할 거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담임 선생님은 눈을 크게 뜨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하신 거 같았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는 중국인인데, 아직도 중국어를 못할까봐 두려워 할까요?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데, 왜 자신에게 모르는 과목을 배울 기회를 주지 않을까요? 만약 문과를 선택한다면, 앞으로 문과 과목만 알게 되겠지만, 이과를 선택한다면 이과 외에 문과의 것도 알 수 있잖아요. 공연히 동일한 학문을 많이 배우는데, 무슨 손해가 있겠어요?"

이유가 산더미처럼 쌓여, 담임 선생님의 말문을 막히게 했고, 결국 나는 당연히 본래의 뜻대로 이과를 선택했다.


그해 중학교 4학년 기말시험에서 나의 물리 과목은 전 학년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것은 내가 중간고사 때 1등을 했던 일 이후로 가장 위풍당당한 일이다. 난 아직도 중간고사 때 성적 발표를 하던 날을 기억하는데, 아침 일찍 학교로 가 성적표 배부를 기다렸다. 자신은 있었지만, 내가 1등의 성적을 받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는데, 난 그해 그 학기의 1등 학생이었다. 난 그 긴 성적표를 손에 들고 미친듯이 기뻐하며 운동장에서 휘날렸다. 학우들이 앞 다투어 보고, 서로 싸우고 뺏고, 득의망형(매우 기뻐하여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는 것)할 즈음, 결국 즐거움 끝에 슬픈 일이 생겼다. 원래 이미 곰팡이가 슬어있던 성적표는 산산조각 나 갈기갈기 찢어졌다. 나는 옆에 서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즉시 교무실로 달려가서 테이프를 빌려 고칠 방법을 생각했으나, 수리의 효과는 미미했다.


아버지에게 보여드렸을 때는, 휴지조각 같았다. 아버지는 손에 그것을 쥐고 줄곧 이마를 찌푸리며 계속 뒤집어 보셨고, 의심 많은 표정으로 결국 참지 못하고 물으셨다.

"왜 좋은 성적표가 이렇게 된 거냐?"
"친구들끼리 돌려보다가 조심하지 않아 찢어졌어요."
"멀쩡히 돌려 보는데 왜 찢어져?"
"걔들이 서로 뺏으며 놀았어요."

아버지의 표정은 여전히 머뭇거리는 거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봤고,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쳐지나가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갑자기 나는 벌떡 일어섰다.

"왜요? 제 성적표가 가짜라고 의심하는 거에요?"

아버지는 속마음을 간파당한듯, 표정이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펄쩍 뛰며 노발대발했다.

"난 이제까지 너의 학습 능력을 의심한 적 없었다, 더구나 시험을 잘 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아버지는 이 말을 하고선 나가버렸다. 나는 분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이지? 갑자기 나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며칠 동안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나와 그는 모두 성질이 고약하지만, 불쾌함을 주는 사람은 금방 잊어버리고 밤새 원망하지 않는다. 아무튼 결국 젊은데, 세상의 모든 불쾌한 일은 몽땅 내던져도 괜찮다. 놀지 않으면 나만 손해다. 여름방학을 결코 헛되이 보낼 수는 없다! 나는 교과서를 전부 옷장에 던져 놓고 셔츠 한 장을 끄집어 내어 매일 개구쟁이처럼 놀다가 집에 돌아왔다.


한 번은 미친듯이 놀다가, 이웃집의 석류를 훔쳐 먹을 생각이 들었다. 그곳엔 조주 소속의 대장장이가 살고있어,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다. 우리는 이런저런 진입로와 탈출로를 잘 계획한 후, 내가 가슴을 두드리며 두려움 없이 말했다.

"내가 갈게! 너희는 나대신 망이나 봐줘!"

난 소매를 걷어올리고, 두 손을 눌러 대장장이 집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내가 살금살금 천천히 몸을 돌려, 지붕에서 뒤뜰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쾅"하는 큰 소리가 울렸다. 온몸이 통째로 지붕을 뚫고 아래로 떨어졌고, 연이어 강철 테이블 앞까지 굴러갔다. 난 "아야!" 비명을 질렀고, 곧 허벅지 바깥쪽에 마비가 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눌렀는데 한 손이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머리를 숙여 다시 보니 상처가 족히 반자(약 15cm)는 되었고, 피가 줄줄 흘렀다. 친구들은 모두 놀라 멍해져, 얼굴이 붉어졌다 희게 질렸다. 난 상처를 누르고,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朱强은 대장장이의 욕실로 뛰어들어가 수건 하나를 가지고 나왔고, 나는 그것을 빼앗아 땅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지웠다.

"빨리 가!"

그들 몇명이 나를 부축한 채 달렸다. 우린 계속 몇개의 거리를 달려서야 잠시 멈춰 쉬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아파서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 골목에 쭈그려 앉아,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머리를 숙였는데, 지방으로 가득한 자신의 복부를 보고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꼴좋다! 돼지 같이 뚱뚱하니, 남의 지붕을 망가뜨릴 수 밖에 없지!"

결국 나는 한 달동안 긴바지를 입었다. 다리에 난 상처를 부모님께 보여드려 내가 한 장난을 들킬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원래는 당연히 짧은 바지를 입어야하는 계절인데, 지금은 매일 긴바지를 입어야만 했다. 너무 더워서 양 허벅지가 땀띠로 가득차 가렵고 아파서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

그래서 난 쿵푸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여름 내내 이소룡처럼 쌍절곤을 수련하는 것을 배웠다. 난 집에 있던 플라스틱 의자의 다리를 뜯어내고 노끈으로 꿰어 쌍절곤으로 썼고, 앞뒤좌우로 난무하여 뒤통수를 여러 번 명중했다. 만약 당신이 어느 여름 방학에 다이아몬드 힐에 있는 작은 구장에서 어린애 4명이 쌍절곤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에게 말하건대 그 중 뚱뚱한 놈이 바로 나였을 것이다!



3. 可立七侠 가립칠협

감독이 "컷"이라고 외친 후 카메라 앞에서의 격투가 중지되었다. 체격이 큰 남자가 내 목을 죄던 손을 내려놓고 나도 흙탕물 속에서 기어 일어났다. 목에 혈장(血浆)이 걸려서 침을 한 번 삼켰더니 무슨 이유인지 사레가 들렸다. 茶水萍姐가 보온병을 건네주어서 입을 헹구고 혈장을 뱉어냈다. 大德은 멀찍이 서서 두 손을 턱에 대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이 모래사장에서 벌써 이틀 내내 촬영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나는 손을 흔들어 그에게 내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한 쪽에 기대어 있었다. "大德!" 내가 심하게 소리치지도 않았는데, 그는 막 꿈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내가 몸을 문지르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는 차 안으로 들어가 옷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땅바닥에 앉아 모래를 한 줌 쥐었다. 이상하다, 이 몇 년동안 촬영을 했는데 이제까지 모래사장을 한가로이 걷는 장면은 찍은 적이 없던 거 같다. 언제나 뒤에 추격자가 있어 뛰어야했고, 거의 죽을 듯이 뛰어다니느라 즐기지 못했다. 언제쯤이면 내가 즐길 수 있을까?

"피곤해서 눈도 못뜨겠는데 웃음이 나와?"
大德이 다가와서 내게 옷을 건네주었다.

"大德! 내가 만약 10년 더 일찍 대만에 가서 활동했다면, 어쩌면 임청하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한가롭게 거니는 장면을 찍었을지도 몰라. 지금처럼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었겠지!"
"노래는 안 하고?!"

그는 딴소리를 했다. 그를 볼 기분이 안들었다. 그는 항상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법을 안다.

일을 마쳤을 때는 이미 새벽 4시쯤이었다. 나는 余佬을 불러내어 야식을 먹었다. 그는 졸음이 가시지 않아 눈을 반쯤 뜬채로 와서, 첫 마디로 "넌 소랑 밭이나 갈것이지, 괜히 체력을 낭비하냐!"라며 욕을 퍼부었다. 난 아직도 십이소(十二少)를 하고 싶은데! 그에게 말해주는 것을 잊었다.


8세가 되던 해 이미, 아침 5시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아버지의 빙실 영업 준비를 도왔다. 빙실은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아버지가 전반적인 것을 주관하며 요리를 맡고 어머니와 누나는 재료 손질을 맡았다. 그리고 나는 청소와 물을 길어오는 일을 맡았다. 그때는 집집마다 모두 공공 수도관에 달려가서 물을 받아왔다. 나는 집의 장남이었으니, 당연히 이 임무를 책임져야했다. 매일 8개의 큰 통을 빙실로 운반하여 4통은 설거지 용으로, 4통은 식수로 썼다. 어린나이에도 의외로 힘이 대단히 세서,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린 적이 없었다. 겨울에 길을 걷는 것은 조금도 즐겁지 않다; 어둠이 짙게 깔리고 달도 지지 않는다. 가끔 고개를 들면 별을 보기도 한다.

나는 작문을 했을 때 다음과 같이 쓴 것을 기억한다.
'매일 아침, 나는 달빛을 머리에 이고, 별빛을 받으면서(披星戴月) 길위를 걷는다. 힘이 들지라도 기분은 좋았다.'

선생님은 내 원고에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성어를 잘못썼어. '披星戴月'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야.'

난 변론하지 않았다. 상아탑에 사는 그녀는 영원히 겨울 아침에 고개를 들어 별과 달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남들을 속일 수 있는 "钻石山 찬석산(다이아몬드 힐)"이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외국기자가 물은 적 있다.

"유덕화씨, 당신은 어렸을 때 어디에서 살았나요?"
"Diamond Hill이요." 웃으며 말했다.

그럴 때마다 서양 사람들의 눈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아버지께서 가족과 고향을 배신하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대포에서 매우 먼 도시까지 이사온 것은 아마 钻石山 곳곳에 다이아몬드가 있으실 것이라 믿으셨기 때문에 이곳에 뿌리를 내린 걸 것이다.


아버지는 재미있는 분이다. 사상은 보수적이지만 행위는 진보적이었고, 평생 전통 행세를 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셨다. 이 때문에 늘 아무 생각 없이 제멋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고, 놀랄 만한 일을 만들어 무리를 떠들썩하게 했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아버지는 파마하는 법을 배우러 가신 적이 있다. 집게로 작게 한 바퀴씩 말은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우리 온 가족이 모두 입이 비뚤어지도록 웃을 뻔 했다. 60년대 말, 여전히 라디오를 듣는 것이 유행이었을 때 그는 나갔다가 텔레비전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 처음에는 흑백이었다가 나중에 흑백은 모자르다며 싫어하시더니 또 나가서 컬러 24인치를 사서 돌아오셨다. 집에 관중석을 차리고 3편의 값으로 1마오씩 받고 영업을 시작했다. 만만히 보지마라. 이 장사는 손님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나는 칠판에 '업무 보고서'를 쓰는 일을 담당했다.

'黄太太는 1마오, 李大婶는 2마오, 张伯는 1마오.
黄太太는 일이 있어 일찍 떠나, 반은 돌려주고 张伯은 중간에 손녀를 추가해서, 반을 더 받는다.'

글씨는 자연스럽게 그때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관중들이 떠난 후, 어머니께서 둘째 누나에게 2위안을 주고 나와 동생을 데리고 나가서 저녁을 먹고 오라고 했다. 그때는 2위안(1위안 = 10마오)도 큰 돈이었는데 완탕면이 겨우 한 그릇에 4마오였고, 소면을 2마오에 팔았다. 누나는 나를 끌고 나는 동생을 업어 세 사람이 떠났다. 연이어 삼거리까지 걸어갔는데, 그곳에는 재래시장이 있어 밤에 많은 노점이 열렸다. 먹을 것도 있고 놀 것도 있고, 마치 소란스러운 마을 같았다. 우리는 한 노름판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누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노름판 주인 손에 들린 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보는 거야?" 내가 물었다
"내가 봤는데 그 카드는 '조커'였어."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내 귀에 입을 대었다.
"못 믿겠어." 내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서서 주인이 공개하는 것을 기다렸다. 어? 뜻밖에도 바로 누나가 말했던 '조커'였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누나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았던 거지!" 내가 또 말했다.
"그래, 다시 한 번 해."
"다음은 '퀸'이야."

열어보니, 정말이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꿈틀꿈틀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또 한 번 시도했고, 스트라이크였다! 연달아 세 번을 맞추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탐욕과 호기심이 섞여, 나는 누나에게 5마오만 들고 1판만 해보자고 꼬드겼다.

"조커" 그녀가 말했다.

카드를 열어보니 '킹'이었고, 나와 누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겁도 없이, 이번 판은 운이 없었으니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누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두 손을 모아 생각했다.

"퀸"

나는 1위안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본전과 이득까지 챙겨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어보니 다시 '킹'이었다! 나와 누나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전의 신통력은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손에 남은 5마오를 쥐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리고 누나가 주저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나는 동전을 손바닥으로 비비고, 그것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이번 판은 분명 '조커'가 아닐 수 없을 거야!"

누나는 두 손을 모았고,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렸고, 카드를 열었다. 아! 5마오, 1위안, 5마오. 총 2위안의 밥값을 전부 잃었다. 난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쉬며, 운명을 받아들였다..'운명에는 때가 있다면 반드시 있을 것이고, 운명에 때가 없다면 강요하지 마라' 처음으로 이 말에 공감이 되었다.


나와 누나는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저녁을 먹었다고 거짓말 치기로 했다. 뒤에서 줄곧 소리를 내지 않던 동생을 바라보니 잠이 들어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분명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집에 돌아가서 배부르게 먹은 척 했다.

"뭐 먹었니?" 어머니께서 별 생각 없이 물으셨다.
"볶음국수랑 죽이요." 나도 아무렇게나 답했다.

줄곧 돼지처럼 자고 있던 동생이 이 순간에 깨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배가 너무 고파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때 일가족 8명의 눈이 모두 커졌고, 나는 누나의 시선이 떨어지는 것도 보았다.

"볶음국수랑 죽 먹었다면서?" 아버지가 물으셨다.
"안 먹었어요." 동생이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고 때마침 내가 동생을 흘겨보는 것을 보셨다.

"너희 무슨 꿍꿍이야? 그 돈 어디에 썼어?!"

나는 말문이 막혔고, 마침내 누나가 모두 털어놓았다. 구류 후 재심 없이, '도박'죄는 즉시 성립한다. 죽을 죄를 지었으니, 도망갈 수가 없다! 아버지는 핏줄이 다 보일 정도로 분노했다. 달려가서 간이 침대용 나무 막대를 뽑아 들고 아무 말 없이 매섭게 때렸다. 10대도 맞지 않았는데 살집과 부기를 구분할 수 없었다. 누나도 어쩔 수 없이 같은 벌을 받았는데, 그녀는 아버지에게 대걸레로 맞았다. 아버지가 나를 때리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부님에게 홍권을 더 일찍 배울 걸 후회했겠네?" 余佬가 놀렸다.

난 웃으며 맞장구 쳤다. 말하자면 나와 余佬는 사(師)형제인데, 우리는 같은 사부님 밑에서 홍권을 배웠다. 그러나 이 또한 나중의 일이다. 홍권을 배운 것은 아버지를 상대하는데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맞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요 몇 년 동안, 아버지는 나를 겨우 두 번 때렸을 뿐이다


또 한 번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마지막 영어 시험을 치르는 날, 어떤 학우가 다가와 도발하였다.

"유덕화, 네가 대담하다며?"
"매우 대담하지!" 나는 가슴을 두드렸다.
"너 강당에서 시험 볼 때, 감히 주사위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걸 던지며 문제를 풀 수 있겠어?"
"못할 게 뭐 있어!"
"좋아, 그렇게 해, 네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마!"
"좋아, 약속해!"

나는 그가 준 주사위를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갔고, 객관식 50문제를 푸는데 반 각(7.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난 전체에서 시험지를 가장 먼저 제출한 학생이었다. 강당을 나오기 전에, 뒤를 돌아보고 그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 무리해서 치룬 대가는 너무 컸다. 성적표가 나왔는데 하! 영어는 겨우 8점이었다. 이게 점수라고? 너무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영어 선생님도 연이어 나를 불러 훈화를 하셨다.

"유덕화 넌 네가 영어 중등학교에 다니는 건 알고있어? 영어 과목에서 불합격하면 진급을 할 수 없어."

즉 이번 학기에 나는 유급을 해야했다. 난 그녀에게 내가 정말 이 규칙을 몰랐다고 말하고 싶었다. 알았다면 영어 과목에서 호기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딱 감고 집에 돌아가는데, 가는 내내 몸의 세포가 끊임없이 죽어가는 걸 느꼈다. 한 발을 막 집에 디디는 순간,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荣仔, 너 이번 학기 시험에서 몇 등 했어?" 난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나는 성적표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노발충관(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다)' 그것이 바로 그 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는 나의 뺨을 때렸고, "짝"하는 소리가 났다. 아파서 눈에 불꽃이 튀었고, 얼굴 반 쪽이 즉시 뜨거워졌다.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고, 나는 "엉엉"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방 안에 있는 7쌍의 눈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고 분노, 연민, 동정 혹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난 용서를 구할 구실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버지의 따귀 한 대 역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내가 약간의 모욕을 받았다고 느꼈다. 난 차라리 다시 매를 맞을지언정, 이런 몰인정한 따귀를 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엄청 많이 울었다. 아버지는 내게 무릎을 꿇게 했고, 저녁을 먹을 때는 나를 문 밖으로 내쫓아 새벽 두 시까지 쭉 서있도록 했다. 난 아버지께 잘못을 인정했고, 그에게 다음 학기에는 좋은 성적을 받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연히 이것도 내가 체면을 회복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학교 수석에서 유급생으로 전락했고, 남매들 앞에서의 나의 지위는 추락하는 승강기처럼 "뚝"하고 저점을 찍었다. 어쩌면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지만, 남동생의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하는데?"라는 한 마디가 매우 귀에 거슬렸고 기가 막혔다. 예전 같았으면, 당당하게 한 마디 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오직 "꾹"하고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누나의 말도 들어야하고, 동생들의 말도 들어야하고, 집 안에선 정말로 완전히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이 울분은 마침내 내가 영어 시험에서 97점을 받아왔을 때 마음껏 토해냈고, 난 다시 학교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다툼이 있는 곳엔 내가 있다. 유덕화는 항상 가장 체포하기 쉬운 개구쟁이 학생이었다. 선생님들은 운동장에서 "유덕화!" 한 마디만 외치면 된다. 그러면 운동장에서 '유덕화'라는 사람이 나와서 바로 자수했다. 나, 余佬, 小权, 肥胡, 朱强, 阿伟, 李景生의 별명은 "가립칠협"이었다. 황대선 경찰들은 경찰 소식을 전하는 남학생들을 우리 학교에 보내어 공수도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모두 매우 신나서 잇달아 참가해서 수업을 몇 번 들었는데, 점차 상대방의 실력이 유명무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 기술이 부족하면 흥이 깨질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모두가 '가립칠협' 같은 엘리트들을 모이게 할 수 없는 법이다.


두 무리는 줄곧 서로 평화롭게 공존했는데 시간이 지나 이 염치없는 놈들이 무술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우리 학교 여학생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는 '이경생'의 여자친구도 있었다. '사가살, 불기욕 (선비는 죽으면 죽었지, 치욕을 당해선 안된다)'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가 없어 나는 '가립칠협'의 이름으로 '少年警讯'에 도전장을 냈다. 한 놈이 '少年警讯'를 대표하여 흥정에 나섰다.

"불량배들! 너희가 감히 황대선 경찰의 사람도 때릴 수 있겠어?"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1대1로 붙어, 장소는 너희 맘대로 골라!" 余佬는 그의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럼 황대선 경찰서에서 싸우자!"
그 놈은 생각을 하더니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듣고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가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겠어, 하!"

결국 모두 근처의 지역 공동시설에 가서 결투를 하기로 결정했다. 과정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결과는 7대0이었고, '가립칠협'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모든 아이들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쓰여졌다.


"우리가 알고지낸지 벌써 18년이 되었구나."
余佬가 갑자기 감동을 받았다.
"그러게, 세월이 얼굴에 전부 새겨졌어." 내가 웃으며 말했다
"......."
"뭐? 뭐라고 했어?"
"......" 余佬가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뭐라고?"
"......"

뭐?! 뭐?!?! 나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히긴스 교수가 오드리 햅번의 발음을 어떻게 교정했는지 기억한다. 언젠가 나도 유리구슬을 한 무더기 사서 余佬의 입 속에 넣어주고, 그에게 'The rain in Spain stays mainly in the plain(*마이 페어 레이디 대사)'를 백 번 읽으라고 가르칠 것이다.


유덕화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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