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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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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从投奔怒海开始 투분노해부터 시작하다

어머니께서 왠지 모르겠지만 어느 상자에서 낡은 대본을 무더기로 찾아, 내 서재의 책상 위에 올려 놓으셨다. 모두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어 난 하나씩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만약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많은 대본을 정리했다는 걸 잊어버렸을 것이다. '신조협려', '투분노해', '녹정기' 그리고 '엽응'. 내 손과 두께를 비교하면 족히 한 자는 될 것이다. 맨 위에 놓여있는 것은 '투분노해'의 대본이었는데, 장마다 이미 누렇게 변했고 아랫부분에도 좀먹은 작은 구멍이 생겨 있었다. 묵직한 대본을 손에 드니 마치 하몽(투분노해 제작자)이 내 앞에 앉아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유선생, 이렇게 급하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영화 촬영이 이미 시작되어서 허안화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모두 하이난 섬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데, 당신이 연기할 배역이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원래 주윤발을 찾고 있었지만, 그가 거절해서 어쩔 수 없이 대체자를 찾아야했어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대본을 내게 내밀었다.

"이게 대본이에요, 가져가서 회사와 상의해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가 시간이 촉박해서, 미안하지만 가능한 빨리 답장해주시겠어요?"

앞에는 매우 중요한 배역이 놓여 있었고,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아 숨이 막히는 듯 했다. 난 24시간 내에 그녀에게 답을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서야 웃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나 같은 아랫사람을 이렇게 정중하게 대하니, 나는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난 줄곧 그녀에게 "주윤발은 왜 이 영화를 촬영하려 하지 않나요?"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실례가 될까봐 끝까지 묻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녀가 먼저 내게 그의 얘기를 꺼냈다.

"주윤발씨가 제게 당신을 캐스팅하라고 제안했어요. 채운곡의 촬영감독인 종지문씨와 임자상씨도 있고요."
"얼마전에 배역 문제로 신경이 쓰여서 친구를 만날 때마다 하소연할 틈도 없었는데, 그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당신의 얘기를 꺼냈어요. 다들 제게 유덕화라는 정말 괜찮은 소년이 있는데 외모도 훌륭하고 연기력도 나쁘지 않다고, 무엇보다 필사적이고 일하는 태도가 일류라고요."

난 지금까지 이런 직접적인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어 귀가 달아올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쳐 기회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치 못했다. 허안화 감독, 임자상, 무새인, 종지문, 관금붕, 구정평, 모두 그 분야의 최고들이었다.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조금 전의 문제만 제외하면 이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도 하몽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주윤발이 '투분노해'를 찍으려 하지 않은 이유는 대만 시장을 잃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진상이 드러난 후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져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 나는? 난 대만 시장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이유 없이 좋은 영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도록 고민했지만 마음의 매듭이 결국 풀리지 않았다.


나는 주윤발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유덕화라는 것을 알렸다.

"유덕화?" 그는 분명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과 '악어담'을 찍었던 그 훈련반 10기 졸업생이요."
"아!"

그가 마침내 기억해냈다. 나는 내 사정을 그에게 대충 설명했고 그는 내가 세트장으로 그를 직접 찾아가 면담할 것을 제안했다. 내가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고성객'을 찍고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우리는 길가의 돌 위에 앉았고 내가 먼저 말을 뗐다.

"하몽에게 저를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 연극을 매우 찍고 싶지만 저도 당신처럼 대만 시장 문제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하이난 섬에서 촬영을 한다면, 저의 대만 시장도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내가 단숨에 말을 마지차 주윤발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그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말해봐, 네 대만 시장이 어디에 있는데?"

그는 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고, 난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한채 말문이 막혔다. 그가 놓치지 않고 말했다.

"내 직언을 탓하지 말고 네가 잘 생각해봐. 네 대만 시장에 어디에 있어? 대만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홍콩 시장도 없지 않아?"
그는 연장자처럼 내 어깨를 툭툭치며 중요한 충고를 했다.
"촬영해, 최소한 홍콩과 중국 시장은 갖게 될 거야. 넌 어떤 시장도 신경 쓸 필요 없어! 너한테 이건 좋은 기회야, 그냥 지나치지 마!"


나는 내가 결코 헛걸음 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나는 이 기회를 잡기로 결정했다. 하몽은 나와 함께 비행기에 탔고,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홍콩을 벗어나 해외로 간 것이다. 그해 나는 겨우 스무 살이었고,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워할 줄 몰라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내 짐은 겨우 작은 캐리어 하나와 몸에 걸친 니트조끼와 청바지뿐이었다. 하몽은 공항에서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개월 동안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적은 짐으로 충분하겠어요?"

나는 웃었고 문제가 없음을 보였다. 우리는 광저우의 바이윈 공항에서 하이난 섬으로 향하는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는데, 하몽은 일이 있어 광저우에서 머물러야 해서 나 혼자였다. 그녀는 내게 반사판 하나와 필름 2상자를 가져가 허안화 감독님께 전달해달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네,네,네"라고 대답하고 돌아서서 게이트를 통과했다. 왼손에는 필름 상자를 들고 오른손엔 가방과 반사판을 들고 황급히 비행기에 올랐는데, 기내 입구에 도착하자 승무원이 나를 저지했다.

"선생님! 당신의 짐은 지정된 부피를 초과해서 반드시 위탁 수송을 해야합니다."
"위탁 수송이요?"

나는 '위탁 수하물'이라는 서비스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귀가 뜨거워졌고 비행기 밖에 서서 직원이 나를 대신해 수하물을 처리하는 걸 기다렸다. 더 난처했던 건 비행기의 모든 승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이 얼굴과 귀가 빨개졌고, 모든 승객들이 나를 욕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비행기에서 나는 시간을 이용하여 대본을 다시 한 번 읽었다. 나는 주윤발의 말에 매우 감사한다. 이 기회 덕분에 내가 얻은 것은 배역 뿐만 아니라, 값진 경험과 우정이었다.


하이난 섬에 있는 2개월 동안 한가로운 날을 보냈다. 우리는 농장을 개조한 주택식 호텔에 머물렀는데 부지가 매우 넓어서 시야가 온통 푸르른 초원이었다. 매일 아침 임자상과 나는 가장 일찍 일어나 종종 아침 식사를 거르고 공원에 가서 달리기를 하거나, 노래 연습을 하거나 혹은 배드민턴을 쳤다. 오후에 시간이 나면 무리 지어 시장을 구경하고 골동품과 공기총을 사기도 했다. 나와 임자상은 공기총을 하나씩 사서 매일 촬영이 없는 오후에 근처 잔디밭에 가서 도마뱀을 잡았다. 모두가 잡은 도마뱀을 돌계단에 올려 놓고 크기를 비교했는데, 진 사람은 밤에 벌로 야식을 준비해야했다. 마치 캠핑을 가서 즐겁게 노는 것 같았다. 2개월 동안 지내며 나는 임자상, 허안화, 관금붕, 구정평 등과 좋은 친구가 되었고, 촬영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투분노해'는 나를 알리게 된 완성된 각본이었으며, 좋은 각본은 확실히 배우가 더 좋은 연기 방법을 발휘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이 모든 건 내가 하이난 섬에서 촬영을 하며 얻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다시 한 번 더 가보고 싶다.



9. 那段虚度的岁月 헛되이 보낸 세월

대만에서 '신 신조협려'를 홍보할 때 한 팬이 내게 양장한 '신조협려' 원작을 선물했고 나는 홍보하는 틈을 타서 대충 읽어보았다. 훑어 보니 마치 보물상자를 뒤집어 쏟아낸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이 쪼그려 앉아 하나하나 되새겨 읽었다.


'신조협려'의 촬영은 TVB에서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꼬박 4, 5개월 동안 밤낮으로 일하며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서로 협력했다. 나는 심지어 드라마 속 배역마저도 사랑했다. 소용녀, 주백통, 동사서독, 곽양, 황용, 육무쌍, 심지어 이막수와 금륜법왕까지도. 이런 캐스팅은 후무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전무했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나의 '양과' 스타일링에 자신이 없어 걱정이 있었을 뿐이다. 모두가 한때 내 외모와 연기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제작자인 소생이 가장 걱정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나를 그의 사무실로 불러 한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이 연기한 '엽응'을 봤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확실히 긍정적인 젊은 인재에요. 하지만 또 다른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을 자신이 있습니까? 그건 '신조협려'입니다."
"있어요." 나는 자신있게 답했다.
"添哥(엽응 제작자)가 제게 당신이 인재라고 했지만, 당신을 캐스팅하는데 여전히 약간의 모험이 있어요. 우린 관중들이 당신의 사극 분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걱정됩니다."

그렇게 되어 세 번의 스타일링을 하고 세 번의 오디션을 봤다. 소생은 관중들의 반응을 떠보는 방법을 더 생각해냈다. 그들은 1984년 미스 홍콩 공연의 게스트로 나를 주선했는데 함께 공연한 사람이 장여평이었다. 이것이 나의 첫 녹음이자 첫 무대였다. 소생은 현장 관중석에 앉아 관중들의 반응을 들었다. '좋다', '훌륭하다', '잘생겼다'가 그들의 평이었다. 그렇게 되어 '양과' 역은 내가 연기하는 것으로 확정되었고, 이 때문에 나도 '신조협려'라는 무협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다.


진옥련의 '소용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보다 '姑姑(소용녀)'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무대 아래의 진옥련도 매우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과 용기있는 태도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진옥련은 잘 웃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면 그녀는 열심히 무공을 연습했고, 아무때나 소용녀와 이막수가 실력을 뽐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운이 좋아서 많은 실력파 배우들과 함께 작업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는 걸 인정한다. '엽응'의 엽덕한, 유소명, 진패, 진민아, 유강 등과, '신조협려'에 이르러 다시 많은 좋은 배우들을 만나게 되었다. '화정소영웅'을 찍으며 알게 된 류위웅과 동위도 있다. 류위웅은 내게 코미디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동위는 내게 많은 무술 동작을 가르쳐주었다.


'신조협려' 이후, 나는 중대한 전환점과 마주했다. 회사(TVB)가 촬영하는 '녹정기'의 위소보 역은 내가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나를 불렀다.

"회사에서 몇 명의 신인을 집중적으로 밀어주려 하는데, 당신이 그중 하나에요. 그렇기에 당신과 미리 재계약을 했으면 합니다. 여기 5년의 계약입니다, 문제가 있는지 봐주시겠어요?"

있어요, 당연히 문제가 있죠. 엄청 큰 문제에요. 5년, 5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이 아득한 미래에 어떠한 약속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회사에 기간을 단축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강경했고, 양쪽 다 양보할 뜻이 없었다. 어쩌면 나에게 다소 예술가의 기질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구속받는 것도 싫어했고 매사에 명예와 돈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돈과 이름 때문에 원치 않는 일을 강요받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 소탈함 뒤에는 약간의 대가를 치뤄야했다.


'녹정기'가 시작되자 회사는 양조위가 위소보 역을 유덕화가 강희 역을 맡았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기왕 이렇게 스스로 가야할 길을 결정한 이상, 나는 이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녹정기'를 제외하면 TVB는 내게 아무 작품도 주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나는 매우 한가해졌고, 나는 강희 역을 연구하는데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나는 도서관에 달려가 강희에 대한 모든 책과 많은 근대 기록을 대출하여 그의 식습관, 생활습관, 심리 변화를 세심하게 참고했다. 나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자료를 많이 찾았다. 난 밤새도록 청나라의 봉호 계급을 줄줄 암기했고, 어르신들을 찾아가 그 시대의 이야깃거리를 물었다. 평소에 일을 안할 때에도 나를 '짐'이라 칭하며 장난을 쳤다. 날 추켜세우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를 높이 추켜세우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드라마가 방영된 후,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다. 사람들은 모두 강희라는 어린 황제를 기억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TVB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번에 계약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난 그동안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처음으로 내 집을 샀고, 인테리어부터 페인트칠, 가구, 발코니의 인테리어까지 모두 내가 혼자 처리했다. 연못의 인공산도 내가 직접 세운 것이다. 새로운 집 전체를 완성하는 데 겨우 11만 홍콩 달러를 썼고 나 자신의 알뜰함과 솜씨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85년 11월, TVB는 정식으로 날 연기반에서 내보냈다. 이러한 처분에 대해 나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기 때문에, 통지가 나온 후 약간 '逆来顺受(부당한 대우를 고분고분 받아들이다)'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종합 프로그램인 '活力之星'으로 파견되었다.

1986년 9월, 나는 정식으로 회사에 의해 숨겨졌다. 그러던 중, 가화전영공사(골든 하베스트)와 2년의 계약을 맺었고 같은 해 10월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86년 내내 나는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계약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계약도 아직 시작되지 않아 '수입'과 '지출'이 문제가 되었다. 그동안 TVB의 봉급은 모두 아버지께 드렸고 스스로 영화를 찍고 무대에 오르는데 부수입을 썼는데, 얼마 전 집을 사느라 또 많은 돈을 썼다. 지금도 여전히 매달 집값을 내야하니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해 때마침 알란탐이 콘서트를 시작했고, 일이 없어 주머니에 한 푼도 없었던 나는 '특별히' 콘서트 티켓을 판매하는 것을 돕고 매일 장국충에게 200위안의 교통비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내가 곤경에 처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여태껏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구인득인(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음)이다. 무언가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것을 잃는다. 난 영원히 이점을 기억할 것이다.



10. 我和我追逐的梦(아화아추축적몽) 나와 내가 좇던 꿈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영화사의 무대감독에 의해 촬영장으로 옮겨져 일을 시작했다. 大德은 다섯 상자의 무대 의상을 먼저 집으로 가져갔다.


머리가 약간 아프긴 하나 정신은 그런대로 괜찮다. 요 몇 년동안 공항을 나가자마자 촬영장으로 가는 것에 이미 익숙해졌다. 촬영장에서 비행기로 가는 작업방식, 익숙해지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촬영이 끝나고 집에 갔을 때는 모두가 잠들어 있었고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나는 부모님을 깨워 함께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내가 말하는 걸 들어달라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당연히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렇게 이기적일 수는 없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어머니께서 미리 준비한 닭국을 한 입 마시고, 면을 삶아 배를 채웠더니 도리어 잠을 자고 싶지 않았다.


난 서재로 들어가 소장 중인 골동품 시계를 모두 꺼내 천으로 하나하나 닦고 태엽을 감아주었다. 딱 60개, 세계 각지에서 온 것들이다. 똑딱똑딱 똑딱똑딱. 나는 소파에 누워 여기저기서 똑딱거리는 소리에 흠뻑 취했다. 똑딱똑딱, 시간과 세월은 이렇게 흘러갔다. 10년. 훈련반에서 지금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무심코 심은 버드나무에서 그늘이 자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0년 동안 찍은 20편이 넘는 드라마와 70편이 넘는 영화가, 많든 적든 이 분야에 대한 나의 열정과 진심을 증명했다. 양가휘, 반굉빈, 오가려, 척미진, 부옥정, 대지위, 연위건 등 그 당시 훈련반 동기들은 적지 않게 현재까지도 연예계에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 특히 나와 반굉빈은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사람은 장문청이었다.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이 담백하다.' 나와 문청의 관계가 바로 그랬다. 우리는 결코 하루 종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그런 친구는 아니었으나, 서로에 대한 관심은 매우 컸다. 매번 문청은 나를 만날 때마다 내 공연에 대해 의견을 하나하나 제시해 주었다. 한때 나는 노래를 할 때 이상하게도 허리에 왼손을 얹는 버릇이 있었는데, 문청이 보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 손을 이렇게 두면 텔레비전에 나올 때 그다지 좋지가 않아, 빨리 자세를 고쳐."

채식을 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문청은 비록 지금 출가했지만, 내 마음 속의 그녀는 여전히 좋은 배우이다.


작은 스크린에서 큰 스크린까지 뛰어오르고 또 그 사이 돌고 돌아 가요계로 뛰어드는 동안, 행운의 신이 항상 나를 돌봐주었다. 내가 낙담할 때마다 항상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내 뒤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데, 이 커다란 손이 바로 일에 대한 나의 집착일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안하는 일을 제외하면, 내가 가장 잘하는 사람이어야한다. 나는 결코 전세계를 이기려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을 이기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연예활동을 사랑하지만 평생 배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에는 각양각색의 단계가 있어야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부모님 마음 속의 어린 아이이고, 앞으로의 나날 동안 우리는 학업, 일, 사랑, 가정을 위해 끊임없이 선택하기 시작한다. 현재의 나는 이 막전(幕前)의 단계를 선택했고,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일하고, 일하고, 또 끊임없이 일하는 일상을 개의치 않는다. 내게 "10년이나 연기를 했는데, 싫증이 나지 않나요?"라고 물은 사람이 있었다. 이건 내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해줄 수 있다.

"전혀!"

단지 체력이 바닥나 피곤할 때도 있지만 한 번 푹 자고나면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인생에는 결코 '10년'이 많지 않다. 내가 벌써 세번째 '10년'을 보냈을 때, 나는 앞으로의 '10년'을 위해 다시 고민해야 한다. 1년에 6편, 다시 1년에 4편, 1년에 2편, 2년에 1편, 나는 이렇게 담담히 무대에서 물러날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내키는 대로 내 남은 인생의 마음의 매듭을 풀어내고 싶다. 이따금 곡을 만들고, 글을 쓰고, 세상을 놀라게 할 대본을 쓰며 나의 창작 세계를 즐기고 계속해서 나의 꿈을 좇을 것이다.


아주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내게 물은 적 있다.

"너는 커서 무엇을 하고싶니?"
"난 양치기가 되고 싶어요."

너른 초원, 하얀 작은 집,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무수한 양 떼와 백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웅크려 졸고 있는 둔한 개를 안고 있다. 나는 나의 또 다른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기를 바란다.


유덕화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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