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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3 11:06
ㅈㅇ
재단사와 제화공이 다녀간 지 며칠 후, 다시 모인 자리에 대령된 족히 수십 벌은 될 듯한 화려한 옷과 신발에 아이스는 피가 싹 식는 느낌이었어. 심지어 오늘은 보석상까지 같이 와 있는 상태였지. 제가 옷 치수를 재고 있을 때 건성으로 카탈로그를 빠르게 넘겨보던 매버릭. 설마 전부 다 주문하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어쩌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을까. 머리가 아파. 어차피 제게 선택권이란 없으니 인형놀이든 뭐든 기꺼이 참여해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었어.
'-너무 지나쳐.'
그 말대로 매버릭은 중간이 없었어. 매버릭의 의도가 무엇이건간에 이 땅에선 귀족은커녕 평민도 아닌 자신이 이런 분수에 맞지 않는 것들을 걸치게 되면 당연히 뒷말이 나오고 시기, 질투에서 비롯된 눈총을 받게 되겠지. 뻔하잖아.
그 날 이후 기사단의 빈 자리는 더 나은 인재들로 빠르게 재편되었고, 눈치빠른 그들은 어리석은 전임자들과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저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일테니 아이스는 되도록 남의 눈에 띄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 그런데 매버릭이 이런 짓을 해버리면 튀고 싶지 않아도 튈 수 밖에 없잖아. 낭패였어.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인 아이스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시키는대로 옷을 갈아입었지. 매버릭이 지켜보는 앞에서 바로바로 환복할 수 있도록 설치된 간이 칸막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새로운 복장을 선보이는 식이었는데 그 횟수가 열 몇 번을 넘어가자 아이스는 진심으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어. 강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물론 마치 스스로가 본인의 의지 따윈 없는 꼭두각시 인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지. 도대체 이딴 게 뭐가 재밌는지 꽤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저를 감상하는 매버릭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생각 같아선 다 때려치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어. 그렇게 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미치도록 가슴 답답해서 그야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지.
흰 옷 타령을 하길래 지난 번 입었던 것과 비슷한 옷 두어 벌 내리고 말 줄 알았더니. 매버릭은 언제나 아이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짓을 하곤 했지. 그래도 아이스는 매버릭을 함부로 거역할 수 없었어. 닉과 크리스의 명줄을 쥐고 있는 게 그였으니까. 항상 또렷하게 상기하고 있는 그 사실, 그것만이 아이스가 이성을 잃고 날뛰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끈이었어. 이렇게 원수와 그의 측근들 앞에서 공공연한 구경거리가 되어도,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미치광이 황자놈의 눈요깃거리가 되어도 말이야.
아이스는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꾹 참고 기계적으로 옷을 갈아입었어. 그리고 매버릭 앞에 서면 그가 이런저런 감상평을 말하고 맘에 안 드는 것은 지적하고 수정하게 하거나 탈락시켰지. 당장이라도 이런 것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스는 인내했어. 한창 즐기는 중인데 중간에 흐름을 끊었다가 매버릭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서였지. 그래서 아이스는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어. 이 천한 몸에게 너무나 과분한 것들이니 부디 거두어달라고. 그러나 매버릭은 그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어.
"본디 귀족, 그것도 공작이었던 자가 고작 이 정도에 과분함을 느낀다고?"
그에 아이스는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어.
"...모두 옛날 일일 뿐입니다. 이제는 천민이며 그 분수에 맞게 살고자 합니다."
"흠...뭐 그렇긴 한데..."
매버릭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는 듯 했어.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지.
"그래도 너무 아깝잖아. 모처럼 그렇게 잘생겼는데."
"......"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숭배받아야 마땅하지만 그것을 잘 가꾸어나가는 것도 중요해. 관리를 소홀히 해서 그 빛을 잃는다면 그건 죄악이야."
도대체 뭐라는 거야? 아이스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는 매버릭 앞에서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애써 참았어. 미친놈이기만 한 줄 알았더니 변태같기까지 해. 아이스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매버릭의 탐미주의적 성향을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도 꾹 참고 다시 한 번 공손하게 사양했지만 매버릭은 내 인형에 예쁜 옷 좀 입히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듯한 반응이었지. 아, 그제서야 아이스는 깨달았어. 애초에 이 미친놈을 설득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던 거야.
꼼짝없이 매버릭의 선물 아닌 선물을 하사받고 만 아이스는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해 쌓여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어. 미친 거 아니야? 옷은 그렇다치고 천민한테 보석 장신구가 웬말이야.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옛날엔 아무렇지도 않게 착용했던 것들이지만 이제는 보기만 해도 거북했어. 물론 그걸 준 사람이 매버릭이었기 때문이지만.
내키지 않아도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문득 동생들 생각이 났어. 이런 건 내가 아니라 닉과 크리스에게 주면 좋을텐데.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이스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매버릭에게 동생들은 잘 지내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봐 차마 묻지도 못했어. 그저 어느 날 매버릭이 또 변덕을 부려 한 번쯤 만나게 해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릴 뿐. 그 때 매버릭의 방과 연결된 종이 울렸어.
-앞으로 넌 무슨 일을 하든 내 옆에 있게 될 거야.
그 때 그 말 이후로 아이스의 방은 매버릭의 옆방으로 옮겨졌어. 그 방은 매버릭이 설렁줄을 당기면 종이 울리게 되어있어서, 아이스는 그의 곁에 있지 않을 때조차 항상 그의 부름에 대기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지. 매버릭은 별 거 아닌 일로도 시도 때도 없이 아이스를 불러대기 일쑤였어.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영광스러울 그 자리는 아이스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자리일 뿐이었지.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면 익숙해지는 수 밖에. 조용히 체념한 아이스는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하며 건조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어.
*
그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나날들이 지나갔어. 하루하루 동생들을 향한 그리움이 쌓여갔지만 무정한 시간은 유속처럼 빠르게 흐를 뿐이었지. 그래도 최근엔 크게 별 일이 없었어. 아이스가 매버릭이 준 옷들을 입고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언제 어디서든 뒤통수가 따가울 만큼의 시선이 꼭 따라붙곤 하긴 했지만. 그는 단단한 사람이니 그 정도는 견뎌낼 수 있었어. 또 반드시 견뎌내야만 하기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말을 듣고 처소로 향하던 길이었지.
"저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아는 체를 했어. 아이스는 멈칫했지만 그 누군가는 그대로 아이스에게 다가왔지. 차림새를 보니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 같았어. 모르는 얼굴이야. 아이스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아이스를 불렀어.
"카잔스키 공작님."
그 순간 아이스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어.
"놀라지 마세요. 저는 공작님과 동향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멋모르고 공작님을 욕하지만 저는 공작님께서 조국을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이스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어. 이 여인이 누군지, 어떻게 저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저를 공작이라 부르며 아는 체를 하다 큰일이 난 사람이 이미 있었잖아. 소름끼치는 불길한 기시감에 재차 주위를 살피던 아이스는 이내 막무가내로 여자를 떠밀었어.
"가시오. 다시는 나를 아는 체도 말고, 공작이라 부르지도 마시오."
"자, 잠시만요. 공작님...!"
그러면서 여자가 내민 건 달걀 두 알이었어. 달빛에 비친 여자의 손목에 노예낙인의 흉터가 선명했지.
"삶은 달걀이에요. 별 것 아니지만...조금이라도 잘 챙겨드셨으면 해서..."
아이스는 환장할 것 같았어.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빨리 가라고 해도 여자는 말을 듣지 않았어. 결국 아이스는 여자의 손에서 달걀을 낚아채듯 가져간 뒤 이제 가라고 다시 한 번 등을 떠밀었어. 혹시라도 누가 봤다간 이 여인 또한 어떤 불똥이 튈 지 모르는 일이야. 그렇게 여자를 보내고 나서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나서도 한동안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지. 아직 따뜻한 삶은 달걀의 미진한 온기가 마치 진저리치도록 질긴 악몽 같았어.
매브아이스
재단사와 제화공이 다녀간 지 며칠 후, 다시 모인 자리에 대령된 족히 수십 벌은 될 듯한 화려한 옷과 신발에 아이스는 피가 싹 식는 느낌이었어. 심지어 오늘은 보석상까지 같이 와 있는 상태였지. 제가 옷 치수를 재고 있을 때 건성으로 카탈로그를 빠르게 넘겨보던 매버릭. 설마 전부 다 주문하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어쩌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을까. 머리가 아파. 어차피 제게 선택권이란 없으니 인형놀이든 뭐든 기꺼이 참여해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아니었어.
'-너무 지나쳐.'
그 말대로 매버릭은 중간이 없었어. 매버릭의 의도가 무엇이건간에 이 땅에선 귀족은커녕 평민도 아닌 자신이 이런 분수에 맞지 않는 것들을 걸치게 되면 당연히 뒷말이 나오고 시기, 질투에서 비롯된 눈총을 받게 되겠지. 뻔하잖아.
그 날 이후 기사단의 빈 자리는 더 나은 인재들로 빠르게 재편되었고, 눈치빠른 그들은 어리석은 전임자들과는 다르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던가 하는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여전히 저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일테니 아이스는 되도록 남의 눈에 띄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지. 그런데 매버릭이 이런 짓을 해버리면 튀고 싶지 않아도 튈 수 밖에 없잖아. 낭패였어.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거절할 수도 없는 입장인 아이스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시키는대로 옷을 갈아입었지. 매버릭이 지켜보는 앞에서 바로바로 환복할 수 있도록 설치된 간이 칸막이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새로운 복장을 선보이는 식이었는데 그 횟수가 열 몇 번을 넘어가자 아이스는 진심으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어. 강한 회의감이 드는 것은 물론 마치 스스로가 본인의 의지 따윈 없는 꼭두각시 인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지. 도대체 이딴 게 뭐가 재밌는지 꽤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저를 감상하는 매버릭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생각 같아선 다 때려치고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어. 그렇게 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미치도록 가슴 답답해서 그야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지.
흰 옷 타령을 하길래 지난 번 입었던 것과 비슷한 옷 두어 벌 내리고 말 줄 알았더니. 매버릭은 언제나 아이스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짓을 하곤 했지. 그래도 아이스는 매버릭을 함부로 거역할 수 없었어. 닉과 크리스의 명줄을 쥐고 있는 게 그였으니까. 항상 또렷하게 상기하고 있는 그 사실, 그것만이 아이스가 이성을 잃고 날뛰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끈이었어. 이렇게 원수와 그의 측근들 앞에서 공공연한 구경거리가 되어도,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미치광이 황자놈의 눈요깃거리가 되어도 말이야.
아이스는 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꾹 참고 기계적으로 옷을 갈아입었어. 그리고 매버릭 앞에 서면 그가 이런저런 감상평을 말하고 맘에 안 드는 것은 지적하고 수정하게 하거나 탈락시켰지. 당장이라도 이런 것은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스는 인내했어. 한창 즐기는 중인데 중간에 흐름을 끊었다가 매버릭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서였지. 그래서 아이스는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어. 이 천한 몸에게 너무나 과분한 것들이니 부디 거두어달라고. 그러나 매버릭은 그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어.
"본디 귀족, 그것도 공작이었던 자가 고작 이 정도에 과분함을 느낀다고?"
그에 아이스는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어.
"...모두 옛날 일일 뿐입니다. 이제는 천민이며 그 분수에 맞게 살고자 합니다."
"흠...뭐 그렇긴 한데..."
매버릭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는 듯 했어.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지.
"그래도 너무 아깝잖아. 모처럼 그렇게 잘생겼는데."
"......"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숭배받아야 마땅하지만 그것을 잘 가꾸어나가는 것도 중요해. 관리를 소홀히 해서 그 빛을 잃는다면 그건 죄악이야."
도대체 뭐라는 거야? 아이스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궤변을 늘어놓는 매버릭 앞에서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걸 애써 참았어. 미친놈이기만 한 줄 알았더니 변태같기까지 해. 아이스의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매버릭의 탐미주의적 성향을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도 꾹 참고 다시 한 번 공손하게 사양했지만 매버릭은 내 인형에 예쁜 옷 좀 입히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듯한 반응이었지. 아, 그제서야 아이스는 깨달았어. 애초에 이 미친놈을 설득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던 거야.
꼼짝없이 매버릭의 선물 아닌 선물을 하사받고 만 아이스는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해 쌓여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어. 미친 거 아니야? 옷은 그렇다치고 천민한테 보석 장신구가 웬말이야.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옛날엔 아무렇지도 않게 착용했던 것들이지만 이제는 보기만 해도 거북했어. 물론 그걸 준 사람이 매버릭이었기 때문이지만.
내키지 않아도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문득 동생들 생각이 났어. 이런 건 내가 아니라 닉과 크리스에게 주면 좋을텐데.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이스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매버릭에게 동생들은 잘 지내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까봐 차마 묻지도 못했어. 그저 어느 날 매버릭이 또 변덕을 부려 한 번쯤 만나게 해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릴 뿐. 그 때 매버릭의 방과 연결된 종이 울렸어.
-앞으로 넌 무슨 일을 하든 내 옆에 있게 될 거야.
그 때 그 말 이후로 아이스의 방은 매버릭의 옆방으로 옮겨졌어. 그 방은 매버릭이 설렁줄을 당기면 종이 울리게 되어있어서, 아이스는 그의 곁에 있지 않을 때조차 항상 그의 부름에 대기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지. 매버릭은 별 거 아닌 일로도 시도 때도 없이 아이스를 불러대기 일쑤였어.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영광스러울 그 자리는 아이스에게 있어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자리일 뿐이었지.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면 익숙해지는 수 밖에. 조용히 체념한 아이스는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하며 건조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어.
*
그렇게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나날들이 지나갔어. 하루하루 동생들을 향한 그리움이 쌓여갔지만 무정한 시간은 유속처럼 빠르게 흐를 뿐이었지. 그래도 최근엔 크게 별 일이 없었어. 아이스가 매버릭이 준 옷들을 입고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언제 어디서든 뒤통수가 따가울 만큼의 시선이 꼭 따라붙곤 하긴 했지만. 그는 단단한 사람이니 그 정도는 견뎌낼 수 있었어. 또 반드시 견뎌내야만 하기도 했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말을 듣고 처소로 향하던 길이었지.
"저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며 아는 체를 했어. 아이스는 멈칫했지만 그 누군가는 그대로 아이스에게 다가왔지. 차림새를 보니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 같았어. 모르는 얼굴이야. 아이스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그녀는 다시 한 번 아이스를 불렀어.
"카잔스키 공작님."
그 순간 아이스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어.
"놀라지 마세요. 저는 공작님과 동향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멋모르고 공작님을 욕하지만 저는 공작님께서 조국을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이스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어. 이 여인이 누군지, 어떻게 저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저를 공작이라 부르며 아는 체를 하다 큰일이 난 사람이 이미 있었잖아. 소름끼치는 불길한 기시감에 재차 주위를 살피던 아이스는 이내 막무가내로 여자를 떠밀었어.
"가시오. 다시는 나를 아는 체도 말고, 공작이라 부르지도 마시오."
"자, 잠시만요. 공작님...!"
그러면서 여자가 내민 건 달걀 두 알이었어. 달빛에 비친 여자의 손목에 노예낙인의 흉터가 선명했지.
"삶은 달걀이에요. 별 것 아니지만...조금이라도 잘 챙겨드셨으면 해서..."
아이스는 환장할 것 같았어.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빨리 가라고 해도 여자는 말을 듣지 않았어. 결국 아이스는 여자의 손에서 달걀을 낚아채듯 가져간 뒤 이제 가라고 다시 한 번 등을 떠밀었어. 혹시라도 누가 봤다간 이 여인 또한 어떤 불똥이 튈 지 모르는 일이야. 그렇게 여자를 보내고 나서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나서도 한동안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지. 아직 따뜻한 삶은 달걀의 미진한 온기가 마치 진저리치도록 질긴 악몽 같았어.
매브아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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