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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8 20:03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괜한 불안감에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 윈터는 임무 중에 이런 식이어선 더더욱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집중하려 애썼지만 마음 속을 쿡쿡 찔러대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임무는 예상보다 시일이 오래 걸리게 되긴 했지만 (와칸다까지 오게 될 줄이야) 딱히 위험도가 높아졌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와칸다의 힘을 빌어 더 든든한 길로 가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을 때 목 뒷덜미에 신경이 쭈뼛하고 곤두서는 것과 같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불안감이 느껴졌다. 왜지? 이 중에 스파이라도 있는 걸까? 와칸다가 우리에게 함정을 파고 있는 건가? 하지만 저만치에 있는 로마노프에게선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만일 이 작전에 어딘가 의심해야 할 구석이 있는 거라면 로마노프야말로 제일 먼저 눈치챘을 사람인데. 물론 그녀에게 가서 그런 걸 물을 수는 없었다. 이젠 다 알겠지. 스타크도 알고 있으니 로마노프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위도우들을 몇이나 죽였는지. 단지 대의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일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감정은 빼두고 협력하는 것일 뿐. 윈터는 자신이 임무지 어디에서든, 언제든간에 로마노프나 스타크에게 죽임을 당한대도 놀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 차라리 이쪽인가? 로마노프가 이번 임무에서야말로 나를... ...럼로우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건 슬프지만 로마노프를 탓하거나 원망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죽인 위도우들도 자신이 럼로우에게 돌아가고 싶은 것처럼 누군가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테니까.

하지만 임무가 다 끝나도록 로마노프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불안과 초조는 오히려 더 거세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본부로 귀환하기 전에 와칸다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사실상 귀빈 대우를 받았지만 윈터는 사람들의 대화에도, 식사에도, 아무 것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이상한 불안감과 럼로우에게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어떤 충동만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내일 오전에 와칸다에서 제공하는 제트기를 타고 오후에 본부에 도착할 것이고, 저녁 쯤에는 럼로우를 보러 갈 수 있을 텐데도 온 몸의 신경이 지금 당장 그에게 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당장 갈 방법은 없는데도. 내일 제트기를 타고 가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인데도. 결국 윈터는 안절부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기 위해 여러 주요 인사들이 모인 저녁 연회 자리를 슬며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바람이라도 쐬면 조금 나아지려나 싶어서. 임무 중이기도 하고 와칸다 왕궁 내이기 때문에 휴대폰 같은 개인 통신기기는 갖고 있지 않아서 잭에게조차 연락해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면 개인적인 통신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하지만 자신과 럼로우가 어떤 사이인지를 와칸다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게 괜찮은 일인지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일단은 우호적이지만 어쨌든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온 나라의 존재를 세상으로부터 감추고 있던 사람들 아닌가? 왜 하필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는 여러 정치적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결정적이었던 건 본인들 내부에 어떤 사정이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그게 뭔지는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내부 사정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진짜 목적을 감추려는 핑계일 뿐일지도 몰랐다.

정글과 같은 야생의 정취가 느껴지지만 사실은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정원이었다. 얼핏 보면 달빛이 온 정원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겠거니 싶지만 사실은 곳곳에 조명이 아주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고, 이렇게 단 향이 나는 꽃이 한가득인데 날벌레 하나 없는 것 또한 부지 전체가 아주 잘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겠지. 윈터는 문양이 조각된 정자의 나무 기둥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저도 모르게 이음매 부분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목공소에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던 럼로우의 말이 떠올랐다. 청문회만 끝나면... 그러면 당장 떠나버려야지. 제대로 알고 지낸 지 몇 년이 되도록 잭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영 모르겠지만, 서스캐치원에서도 그랬듯이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거였다. 윈터가 잭에 대해서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잭은 럼로우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없애버릴 사람이라는 거였다. 윈터는 그 대상에 자신도 포함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실은 그에게 안심이 되었다.

럼로우는 잘 지내고 있을 거고, 지금 이 이상한 불안감은 근거도 이유도 없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연회장으로 돌아가려다가 역시 내키지 않아 숙소로 향했다. 숙소에서 연회장까지는 제대로 된, 그러니까 큰 중앙 복도를 통해서 안내 받았기 때문에 그 길대로 가는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었겠지만 그러자면 연회장을 통과해야 하니 윈터는 숙소의 발코니에서 보았던 지형으로 얼추 추정해 건물 바깥을 돌아가고 있었다. 저만치에 건물 옆쪽에 붙은 작은 입구가 보이는 걸 보면 영 틀린 추측은 전혀 아니었으나 어쩐지 이쪽에는 가로등이 듬성 듬성 있는걸로 보아 손님, 그러니까 외부인들이 멋대로 다녀도 되는 길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외부인이 이런데서 어물쩡 거리는 건 아무래도 너무 수상쩍어 보이려나 싶어 다시 얌전히 연회장 쪽 길로 돌아가려는 찰나, 반대편 코너에서 오코예와 너댓명의 도라밀라제가 나타났다. 양측 모두 잠시 멈칫한 사이 윈터는 자신이 질문도 없이 곧장 공격 당할 만큼 수상쩍어 보이진 않았기를 바라며 천천히 반걸음 물러섰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제 양 손에 무기가 없는 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자신은 메탈암 때문에 이것도 무장 상태라고 평가받을지 모르지만.

"숙소로 돌아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다행히도 오코예는 느슨한 태도로 말을 걸며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다른 도라 밀라제들은 여전히 창을 보란듯이 쥐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을 통솔하고 있는 오코예에게서는 공격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윈터도 어깨에 힘이 한결 풀어졌다.

"네. 일찍 쉴까 해서요."

자신이 뭔가 스파이 짓을 하려 했다고 오해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도 오코예의 시선은 계속해서 윈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다른 도라 밀라제들을 먼저 보내고는 (어쩐지 그들은 자신을 보고 키득대며 사라졌다) 그에게 길을 안내해주겠다며 나섰다. 윈터는 순순히 그녀를 따랐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였다. 자신을 의심하거나 경계해서 감시하기 위해 길을 안내해주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장군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고작 자신에게 길 안내를 해줄 일인가 싶었다. 자신이 쉴드 측 사람이긴 하지만, 어벤져스 같은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괜히 다른 길로 왔군요. 바쁘실텐데."

숙소 문앞에 도착한 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데, 오코예는 여전히 그를 이리저리 뜯어보듯이 빤히 보더니 불쑥 물었다.

"통신기 빌려드릴까요?"

"네?"

아까부터 계속 그랬지만, 이건 특히나 영문을 모르겠어서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고 되묻자 이번엔 오코예가 '네?'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지? 뭔가 오해가 있었나? 아니면 내가 잭에게라도 연락하고 싶다고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말해버렸었나? 한동안 복도에서 서로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다가 오코예는 불쑥 윈터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그의 목덜미 근처에서 숨을 들이켰다. 윈터는 거의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어쨌든 그녀가 윈터의 냄새를 맡기엔 충분했다.

"무슨-"

"...제가 잘못 짚었나보네요. 실례했습니다."

오코예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대로 가버릴듯이 물러섰고, 윈터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뭔가 해답을, 그러니까 지난 며칠간 계속된 이 이상한 불안감의 원인을 그녀는 아는 걸까? 와칸다는 기술이 발전한 나라니까, 뭔가...

"잠깐만요, 무슨, 방금 뭐였습니까?"

오코예는 뭐라 대꾸하려다가 말이 엉킬 것 같았는지 그만두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윈터의 목덜미 근처를 대충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본딩 상대 없으신거잖아요?"

"...없는데요."

곧장 럼로우가 떠올랐지만 본딩 된 사이가 아닌 건 맞았으니까. 그제야 오코예가 자신의 냄새에서 뭘 확인하려 했는지가 이해 갔다. 본딩 상대가 있으면 본딩 향이 날테니까. 하지만 그건 왜?

"며칠 째 길 잃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길래. 본딩 오메가랑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러신가 했죠."

"...아뇨 ...없어요."

"네. 냄새 보니까 알겠네요."

여전히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오코예와 어색하게 헤어지고 숙소로 들어가 이런저런 정돈을 하는 내내 윈터는 머릿속이 복잡하게 가득찼다. 럼로우에게 자신이 마킹을 여러 번 시도하긴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는데. 그야 안정 감각 같은 걸 주고 받긴 하지만 그건 둘다 일방적으로 느끼는 것 아닐까. 본딩이 된 징후도 없고, 본딩 향도 없고... 설사 본딩이 어떤 형태로 된거라 한들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알파에겐 그렇게 영향을 줄 일이 아니었다. 알파 쪽에서 분리 불안 같은 걸 겪는 건 극히 드문 일이기도 했고, 그것보단 덜 드물게 오메가의 신변에 큰 위험이 생기면 알파가 감지할 수 있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럼로우와 자신은 본딩 된 사이가 아니었다.

잠이 도저히 오지 않을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침대에 기어들어가 억지로 눈을 감으면서 윈터는 내일 본부에 도착하면 보고고 뭐고 그냥 집에 곧장 가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잭은 럼로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침실 문을 닫고 집을 샅샅이 뒤졌다. 모서리와 가구 뒷편, 몰딩의 틈새 부근까지 전부. 도청기 세 개. 카메라는 없고. 이 정도면 양호한 것 같았다. 되도록이면 소리가 나지 않게 하다보니 조금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럼로우가 깨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도청기를 전부 처리해버리고 나자 곳곳에 몇가지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엌 카운터에는 수면제 몇 알이 흩어져 있었고 약간의 마른 핏자국이 있었다. 저 정도로 마른 피는 닦기보다는 그냥 긁어내는 게 수월하겠지만, 캐비닛의 페인트칠도 벗겨질텐데. 잭은 잠시 캐비닛 모서리를 보다가 제 나이프를 꺼내 핏자국을 살살 긁어냈다. 하얀 페인트도 어쩔 수 없이 약간 벗겨져 나무결이 희미하게 드러났지만 어차피 물과 세제로 닦아내는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잭은 식탁 아래에서도 발견한 수면제를 두 알도 치웠다.

침실에서는 럼로우가 여전히 잠든 채인걸 확인하고 피에 젖어있는 카펫 바닥 한 켠으로 향했다. 럼로우가 팔을 긋는데 사용했을 나이프는 부엌에도, 침실에도 없었다. 원래 늘 있는 자리인 화장실 서랍에도 없었다. 어쩌면 바튼이나 로저스가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잭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럼로우가 상당히 오랫동안 썼던 나이프인데. 서스캐치원에 갈 때에도 챙겼던 거였다. 물론 이제 더는 럼로우가 임무에 나간다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그가 오랫동안 써온 물건이 멋대로 버려졌다는 게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건 아주 좋은 나이프였는데. 그 정도로 잘 만든 다마스커스 나이프는 흔지 않았다. 이 새끼들은 지들이 뭘 버린지는 아는 거야? 아니지. 바튼도 좋은 나이프라면 비싸서 원하는 만큼 못 살 뿐 눈이 좋은 녀석이니까 버렸을 리가 없었다. 그럼 로저스인가. 이 새끼는 뭐 하는 것마다 제대로 하는 게 없네.

잭은 일단 자신이 백업용으로 들고 다니는 나이프의 날을 알코올로 잘 닦아 화장실 서랍에 넣어 두었다. 럼로우가 식칼 같은 크고 거친 것으로 팔을 베는 건 상상만 해도 아찔하니까. 그런 걸로 자해했다간 피만 좀 나는 게 아니라 손목 신경이나 힘줄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나이프마다 용도가 다 있는 거니까. 그 다마스커스는 딱이었는데. 일단은 제 나이프를 넣어두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아무래도 저건 서레이션이 너무 크고 범위가 넓었고 (잭의 취향이었다) 잭은 럼로우가 실수로 의도한 것보다 더 깊게 자해하게 되는 건 원치 않았다. 물론 가장 좋은 건 그가 자해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로저스나 쉴드 근처에 있는 한 그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카펫. 그렇지.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건조한 계절이어서 그런지 핏자국은 벌레 같은 게 꼬이는 일 없이 잘 말라 있었다. 잭으로서는 벌레만 없다면 상관 없었지만, 럼로우는 깔끔한 걸 좋아하니까... 카펫 털을 잡고 살짝 뜯어내 보니 카펫 아래의 바닥재와 콘크리트층은 별로 물들어있지 않았다. 이걸 교체하자면 어쨌든 이 방의 카펫을 전부 (아니면 최소한 한 개 롤은) 뜯어내야 할테고 그건 시간이... 어차피 다음 달이면 (청문회가 다음 달이라고 했으니) 이 집도 그만인데 굳이 그렇게 성가시게 할 일인가 싶었다. 다음 세입자가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럼로우는 더러운 걸 싫어하니까... 잭은 한동안 카펫의 핏자국을 내려다보다가 화장실 안쪽 입구에 있던 러그를 침실쪽으로 옮겨 핏자국을 덮어버렸다. 깨끗해졌다는 생각에 만족감이 들었다.

짐가방에 들어있던 몇 안 되는 옷가지와 물건도 정리하는데 상자는 비어있지 않고 자신이 부숴버렸던 마스크 조각이 들어있었다. 로저스가 손 댈 수 있는 틈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건 럼로우의 말대로 샤워하러 잠시 비웠을 때 뿐이었는데, 그때는 럼로우가 일어나있었으니까... 럼로우가 이런 걸 왜 챙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보관하고 싶은 거라면 뭐... 잭은 상자를 원래의 자리인 첫번째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집을 정도하고 나니 잭도 슬슬 피로감이 몰려왔다. 임무지에서 저격 대기를 하느라 계속 깨어 있었던 것도 그렇고, 병실에서 선잠을 자느라 어깨가 결린 것도 그렇고. 잭은 거실에서 쿠션을 하나 가지고 와 럼로우의 침대 옆 바닥에 앉아 눈을 감았다. 잠이 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거의 눈을 감자마자였을 것이다.






럼로우의 거칠어진 호흡소리에 잠이 깬 건 저녁 무렵이었다. 해질녘이라 어스름해진 침실에 노란 램프 불을 켜자 럼로우가 침대에 웅크려 누운 채 숨이 막히는 것인지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는 게 보였다. 열은 없었지만 식은 땀이 맺힌 낯빛은 창백했고 통증이 있는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잭은 의료진에게 받았던 약 중에 형질안정제를 꺼내 곧바로 럼로우의 목덜미에 주사를 놓았다. 달칵 하고 약물이 들어가는 소리가 나고, 럼로우는 약물이 들어가는 저릿한 통증에 약하게 신음했지만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는 잭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손길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고, 입에 대어준 얼음물도 조금 받아 마실 수 있었다.

잭은 제 어깨에 기대 겨우 앉아있는 럼로우를 내려다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상태가 나빠진 거라고 하기엔 다시 식사도 전혀 못했고, 럼로우는 의료진에게 다른 문제는 없다고 대답했지만 그의 거리감 인지가 어긋나 있다는 건 집으로 오면서, 그리고 침대로 그를 데려다주면서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눈이 문제인 건가? 아니면 귀의 평형감각? 물어봐도 솔직하게 대답해주진 않겠지.

이제 럼로우는 자신이 십 년 넘게 알았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정작 언제든 임무지에서 누가 먼저 죽을지 몰랐을 시절에는 그가 그렇게나 깎을래야 깎여지지 않는 단단한 바위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군인 일 따위는 그만뒀는데도 그가 언제든 바스라져버릴 것 같아보이게 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앞으로 조금 나아질 수는 있어도, 그 때처럼 괜찮아질 순 없을 것이다. 의료진은 형질안정제와 희석혈청앰플을 잔뜩 주면서 이런저런 설명과 핑계를 덧붙였지만 결국엔 그냥 상태에 따라 번갈아 투여하라는 말이었고, 그건 치료가 아니라 현상 유지일 뿐이었다. 운이 좋아야 현상 유지겠지. 혈청으로 강화된 몸인데도 이젠 회복력도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오늘 떠나버려도 돼요."

지금 당장 떠나버려도 될 일이었다. 굳이 청문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셋이서 어디든 가면 되니까. 쉴드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도 우리를 성가시게 하겠지만, 그럼 또 어때. 럼로우가 여기서 이렇게 사그라져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쉴드가 추격자를 보내면 전부다 헤드샷으로 없애버려야지. 아니, 그냥 팔다리의 신경만 노려서 불구로 만들어줄까. 그러자. 반 정도는 팔과 척추가 나가서 쓰러진 채로, 나머지 절반의 동료들이 과다출혈로 천천히 죽어가는 걸 보게 하는 거야.

"...괜찮아."

럼로우는 약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답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대로 도망치자고 하고 싶었다. 저 정도 약이면 2-3주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윈터가 오는 것만 며칠 기다리고 떠나버려서 오두막에서처럼 셋이서 지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야 자신이 죽은 뒤에 잭과 윈터가 어떻게 되든 상관도 안 한다면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잭이 저렇게 말해준 것만으로도 족했다. 잭은 재판 거래 얘기는 모르지만 그래도 청문회 증언을 대가로 우리를 놓아준다는 정도로는 이해하고 있을 텐데도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쉴드에 쫓기는 입장이 될 걸 알면서도 당장 떠나버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게 좋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준다는 게 좋았고, 그게 잭이라는 것도 좋았다.

뜨거운 설탕물로 이른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수면제 반 알(수면제의 종류와 양에는 엄격한 제한이 생겼다)을 먹고 잠들었다가 여전히 잠이 얼핏 깨었는데 침실 밖에서 잭과 윈터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약 기운 때문에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둘인 건 확실했다. 윈터. 윈터의 알파향이 마치 갈증이 나듯이 그리웠다. 그가 곁에 와줬으면 싶었지만 아직 잠이 제대로 깬 것도 아니고, 다시금 잠이 쏟아질듯 말듯해서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 문이 열리고 윈터가 들어왔다. 럼로우는 눈도 뜰 수 없었지만 갓 깎은 잔디 같은 윈터의 향 만으로도 숨이 트이는 것 같았고, 아마도 악몽 때문이었을 불안감이 단번에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잠결이 짙었지만 침대의 움직임으로 등 뒤에 누군가가 눕는 게 느껴졌고 몸은 반사적으로 긴장했지만 더 가까이 느껴지는 알파향에 상대방이 윈터인 걸 알고는 곧장 어깨에 긴장이 풀어졌다. 오히려 그에게 닿고 싶다는 생각에 몸을 약간 뒤로 기울이자 목덜미에 윈터의 뺨에 닿는 게 느껴졌다. 보통은 누가 제 목에, 특히 뒷목에 닿으면 거부감이 들겠지만, 하지만 윈터라면 그저 안심되고 차분한 느낌 뿐이었다. 제 앞쪽에서는 누군가가 손을 내줬고, 럼로우는 거의 자동적으로 그 팔을 붙들어 이마에 대었다. 나이프의 굳은 살이 있는 익숙한 손.

조절이 또 미숙해졌는지 자신의 네롤리와 패츌리향이 방안에 느껴졌지만, 신경쓰이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불안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안전하다는 생각 뿐이었고 럼로우는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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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잭이 능숙한 스킬로 카펫 핏자국을 빼는 거도 생각했었는데, 쟤는 사실 너저분한 성격인데 럼로우가 깔끔하니까 어케든 치우고 사는 애인 거라서 그렇게 치밀하게 안하고 대충 카펫으로 덮는게 맞다고 봄. 증거인멸 해야 하는 상황이면 CSI가 와도 혈흔 못 찾을 만큼 프로페셔널하게 처리했겠지만 이건 그냥 집청소였으니까 그렇게 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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