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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0 23:01

잘생긴 체육 선생님의 운나쁜 동거인 3 https://haep.club/549158124



“그래도 이만하면 꽤 봐줄만 하지 않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부터 거울을 쳐다 보며 중얼거리는 대만이다. 반한 사람으로서 딱히 반박할 이유는 없지만 괜스레 삐딱한 소릴 하게 된다.
 

“갑자기요?”

“아니, 우리 애들이 좀 꾸미고 다니라고 맨날 잔소리 하잖아.”
 

중학생들한테 듣는 조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태섭은 핑계 삼아 마음껏 대만의 위 아래를 훑고 대꾸했다.
 

“선배는 그냥 기본 스타일이 낫지 않아요? 꾸며봤자…….”

“칭찬이냐, 까는 거냐?”
 

칭찬이다. 태섭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뒷말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섭이 보는 대만은, 흰 셔츠에 슬렉스 차림이든 티셔츠 한 장에 반바지든 몸선이 늘씬하고 군더더기 없어서 뭘 입어도 잘 어울렸다. 잘난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게 인상을 약간 거칠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나이가 좀 더 들고 나니 부드러운 느낌으로 바뀌어서 꽤 건실해보이는 편이랄까.
 

‘요컨대 상견례 프리패스상. 아니, 그래도 그건 좀 너무 주관적인가.’
 

태섭 자신은 원래 잘 차려 입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고, 언젠가부터는 그게 또 대외적으로 평이 좋아서 과감한 시도도 종종 하는 편이었다. 미국에서는 옷 잘 입는 걸로도 꽤 언론을 탔었다. 말 그대로 문짝만한 옷걸이들 사이에서 체형에 맞게 입으면서도 용케 저런 과한 걸 소화한다는 이야기를 제법 들었다. 하지만 문화의 차이도 있어서, 한국에 들어와서는 조금 얌전한 차림으로 타협하는 중이었다.
 

“체육교사가 체육복 입고 다니는 게 뭐 어떻다고….”
 

대만은 투덜대다가 뭔가 생각난 듯, 태섭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너 가진 거 중에 나 빌려입을 만한 거 있음 좀 줘 봐.”

“어떤 걸 원하는데요?”

“적당히 신경 쓴 것 같은 차림인데 세련되고 애들 입 딱 벌어질 만한 거.”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쉬는 날 오후, 할 것도 딱히 없었고 즉석에서 정대만 옷 갈아입히기가 시작되었다. 태섭이 지내는 방에는 지난 몇 주간 차곡 차곡 늘어난 짐이 나름 위치를 자리잡고 있었다. 한쪽 벽은 스탠드 옷걸이들로만 채워져 있었는데, 미국에서 올 때 가져온 캐리어의 옷은 많지 않았지만 배편으로 보낸 옷이 한 주 전쯤 막 도착해서 미처 덜 푼 박스도 아래 남은 상태였다.
 

“이건 어때?”

“아래는 차라리 이게 낫지 않아요?”

“이 셔츠는 뭔데 단추가 이러냐.”

“원래 그렇게 입는 건데.”
 

대만의 상체는 태섭보다 볼륨감이 없는 편이었지만 워낙 팔다리가 길쭉해서 어지간한 옷은 같이 돌려입을 수 있을 듯 했다. 수트 종류는 아무래도 기장이 맞지 않아서 남의 옷을 입고 있는 티가 확 났지만, 태섭이 즐겨 입는 옷들은 품이 넉넉하거나 아예 딱 달라붙도록 체형을 강조하는 옷이라서 의외로 대만이 입었을 때에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것 좀 풀러줘.”
 

옷을 같이 고르고 갈아입는 걸 돕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이 닿았다. 시선이 끈적해질까 봐 최대한 담백한 눈을 뜨고 있었지만 사심을 채우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벤트였다. 이대로 지낼 수는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태섭은 아직 적절한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둘이 보내는 시간이 생기면 그 순간에 충실하고자 미래의 일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역시 이게 제일 맘에 든다, 난.”

“응, 그중에서도 무난하긴 하죠.”

“이 정도면 신경 썼다~는 느낌 들지 않냐?”

“월요일에 빌려줘요? 애들 보여주게?”
 

살짝 웃음을 머금고 묻는 태섭에게 대만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덧붙였다.
 

“빌리는 김에 일단 주말에.”
 

대만은 벌려놓은 옷가지를 같이 정리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같이 분주히 움직이던 태섭의 손이 일순 멈추었다.
 

“약속 있어요?”

“뭐냐 그, 엄마가 좀 시끄러워서 다녀와보려고.”
 

그야 대만은 태섭의 감정은 전혀 눈치채고 있지 못하지만, 이미 한 번 실패를 경험하고도 또 집안 등쌀에 떠밀리는 만남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와 즐겁게 나눌 이야기는 아니었다. 띄엄 띄엄 무엇 하나 구체적인 단어는 없는 문장인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알아듣기에 어려운 소리는 아니다. 태섭은 내심 태연하게 옷걸이를 마저 걸면서 물었다.
 

“선배는, 결혼 생각은 있는 거에요?”

“아니 뭐, 일단 만나보는 거지. 운동 관두고 직장도 좀 자리잡힌 거 같으니까 요새 다시 계속 끈질기셔서 뭐라도 해야할 거 같고.”

“좀 의외네요.”

“왜?”

“선배한테 관심 있어 하는 사람, 많지 않았어요? 요즘엔 조건 보고 중매 결혼 많이 하긴 하지만, 그런 거 안 좋아할 거 같이 생겨서.”

“뭐래, 나 별로 실속 없었다. 뭐 대학 때 축제 하면 투표 1위도 해보고 그랬는데, 연애까진 잘 안가게 되더라고.”

“간절함이 별로 없었던 건 아니고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왜 이런 얘길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태섭은 어딘가 어긋난 감정을 조절하는 것으로 벅차서 대만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뱉어댔다. 그럼에도 대만은 태섭의 이변을 온전히 눈치채지 못한 채,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고지식하게 받아들이고 고민해 보는 것이었다.
 

“그 비슷한 얘기 좀 들었던 것 같긴 해. 근데 나… 그렇게 무심한 스타일은 아니었거든? 고백 받고 사귀기 시작하면 연락도 꼬박꼬박 하고, 데이트 장소도 잘 찾아놓고…. 성실하게 했는데도 내가 별로 많이 자길 좋아하지 않는 거 같다고 서운해하면 어떻게 해야 하냐.”
 

대만은 몇 번인가의 짧았던 연애를 떠올렸다. 대만에게는 그 대부분의 연애가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조금씩 호감이 쌓이고 그리움이 생길 만하면, 실망하고 떠나버려서 언젠가부터는 연애에 큰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결혼은 모르겠고…, 그냥 계속 혼자 사는 것 보단 마음 잘 맞는 사람이랑 같이 살면 더 재밌겠단 생각은 하지. 그니까 나같은 타입한테는 중매 결혼이 더 맞을 수도 있을 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태섭은 내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이미 걸어놓은 옷의 매무새를 정돈하기 바빴다. 눈을 마주치면 표정 아래 감추인 마음을 읽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넌?”

“나요?”
 

그래서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반대쪽을 향했을 때 더는 정돈할 것이 없는 옷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 보여준 거 보니까 인기 엄청 많더만. 한국 들어오느라고 정리한 거야?”
 

별로. 사귄 적도 딱히 없는데 무슨 소립니까. 태섭은 흔히 받는 오해를 푸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졌다. 수절하고 지냈던 건 아니지만 연애라고 부를만한 것도 없었다. 그럴 틈도 없었고, 그럴 상대도 그쪽엔 없었으니까.
 

“무슨 정리를 해요. 있어야 정리를 하지.”

“진짜? 아 뭐 하긴. NBA가 어디 동네 리그도 아니고, 그럴만도 했겠네.”
 

태섭의 심드렁한 대답을 별다른 의심도 없이 순순히 납득하는 게 농구에 미쳐본 적 있는 사람 답다. 대만은 그동안 진짜 고생 많았겠네 라고 이마에 대문짝만하게 쓴 것 같은 표정으로 태섭의 어깨를 툭 치고 덧붙였다.
 

“옷 잘 세탁해서 돌려줄게.”
 

어차피, 다른 사람이랑 선보러 갈 옷을 같이 고르느라 한 30분 신나서 들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태섭에게는 어떤 뉘앙스로 말했어도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점심 시간에 맞춰 자신이 골라준 옷을 입고 머리까지 풀로 세팅하고 나서는 대만을 보내고 태섭은 빈 집에 남아 대자로 침대 위에 누웠다. 마음이 있어서 썸이라도 타던 상대를 만나러 간 것도 아니고, 데이트라고 해도 제삼자의 눈에서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조건으로 골라 만나는 자리다. 하물며 대만은 결혼이 급하거나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집에서 성화인 것을 달래주는 목적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열심히 설득해본다.
 

‘근데 그래서 뭐.’
 

결국 티를 내지 않으면, 제대로 확실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대만이 다른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 만나는 지와 상관없이 태섭의 자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동성의 후배이고, 임시로 얹혀 사는 동거인일 뿐이다.
 

이번에 선을 보는 상대가 마음에 든다면?

이번은 아니라도 계속 들어오는 중매를 못이긴 척 받다가 그 중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생긴다면?

이 집조차도 원래는 그렇게 만났던 사람 중에 평생을 함께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구매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대만에게 있어서 태섭이 그런 것처럼 애타게 원하는 상대였을까? 대만이 했던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 그렇게까지 간절한 상대가 아니어도 평생을 같이 보낼 수는 있겠다고 생각할 만큼 기준이 낮은 것일까? 
 

억울한 일 아닌가. 자신과 비교하면 그렇게나 낮은 기준인데 정작 가장 원하는 사람에게는 턱이 높은 정도가 아니라 닫힌 문처럼 느껴진다니.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대만에게 털어놓았을 때의 반응을 상상할 수 없었다. 가드는 경기의 흐름을 예측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재빠르게 찾아가는 포지션이다. 어떤 무지막지한 상대와의 시합에서도 이렇게 절망적이진 않았다.
 

‘기회는… 기다린다고 생기지 않는 거였지.’
 

적절한 기회를 보다가 이야기한다든가, 그럴 수 없는 일이었는데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거였다. 마음이 순식간에 착 가라앉았다. 
 

저녁 시간이 되어 대만이 돌아오기까지 태섭은 내내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어느새 집안 여기 저기 널려져 있는 자신의 짐들을 하나 둘씩 찾아보았다. 짐을 싼 것은 아니다. 서둘러서 짐을 싸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머릿 속에 계획을 세운 것 뿐이었다. 차에 넣어서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박스로 담아놓았다가 나중에 찾으러 올 것들은 어떤 것인지 나름 대로 구분해 놓고, 오늘 밤에라도 다른 곳에 머물러야 한다면 어디서 지내는 것이 좋을 지, 호텔도 검색했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쫓아내진 않겠지만.’
 

대만이 쫓아내서가 아니라, 태섭 자신이 곁에 있을 수 없다고 느낄지도 몰랐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준비를 한다고 생각했음에도 현관 비번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기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오고야 마는 것이다. 마침내. 피해갈 수 없는 순간이.
 

이윽고 집 안으로 들어선 대만은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구두를 벗어 신발장에 넣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냥 집에 있었냐?”

“예, 뭐.”

“아~ 힘들다. 배고파.”
 

어느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고, 상대를 정중히 적당한 곳까지 배웅하고서, 모처럼 차려 입은 옷이 아까워 근처에 사는 국내 리그 시절 후배까지 만나고 오는 길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태섭은 첫 만남에 꽤 늦은 귀가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땠어요?”

“응? 아~. 뭐, 아직 잘 모르지.”
 

상대는 무난했다. 대화가 어렵지도 않았고, 스타일도 좋은 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대만의 연애 상대는 처음엔 다들 비슷한 느낌이었다. 마음을 열고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래서 더욱 상대가 딱히 거슬리는 부분이 없다면, 대만은 한 번 만나는 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대만 쪽에서 운을 띄우긴 했지만, 빈 말이 아니라 정말 다시 볼 건지는 상대에게 선택권이 있는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집에 돌아와서 태섭과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대만의 관심은, 예전 팀에 들어오게 됐다는 신입에게 옮겨간 상태였다.
 

“또 만날 거에요?”

“한 번 보고 어떻게 아냐, 그쪽에서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서너 번은 만나봐야지.”

“그런가.”
 

태섭은, 대만이 거실로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방으로 향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더 이상 미룰 곳이 없다고 결심하니 이상하게도 1분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막 외출을 마치고 온 대만은 분주하게 단추를 푸르다가 등 뒤에서 느껴진 기척에 돌아보았다.
 

“…왜?”

“잠깐 좀, 할 말이 있는데….”
 

이렇게 시작한다고? 태섭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멋도 없는 말을 뱉었다. 대만은 태섭에게 빌린 셔츠를 벗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잔뜩 굳은 태섭의 얼굴을 보니 뭔가 중요한 일인 게 틀림없었다. 급한 고민이라도 생긴 것인가 싶어서 방문 바깥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고서 대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인데.”
 

태섭은 두서 없이 생각해온 것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선배 어제 그랬잖아요.”

“응? 뭐.”

“마음 잘 맞는 사람이랑 같이 살고 싶다. 그래서 중매가 더 맞을 것 같다.”

“어? 뭐 그렇지.”
 

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만은, 보기와는 다르게 이 생각 깊고 꼬장꼬장한 구석이 있는 후배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추측해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선배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낄 만큼 절박하게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없나? 하고……. …맞아요?”
 

연애 상담인건가? 대만은 여전히 속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글쎄, 표현하기 나름인 거 같은데, 내 경우는 그렇게 되기 전에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게 맞을 거 같아. 속도가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감정은, 생기는 게 아니라 키워가는 것이라고 대만은 생각했었다. 운명처럼 한 눈에 반한다는 것도 믿지 않는다. 아니면 그런 운명은 이미 사람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나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 어느 나이가 되고부터는 같은 선수끼리도 부끄러워서 못하는 소리다.
 

“그럼, 선배한테는 이런 소리가 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건데.”

“응.”

“나는 좀, 꼭 이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어요.”

“어.”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고등학교 때 이한나를 엄청 좋아했었지 않나? 근데 그때는 다른 여자애들한테도 마구잡이로 고백하고 다녔었는데, 이건 좀 너무 옛날 얘기라서 참고가 안되려나. 대만은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망이 없어보여도 좋아한다는 얘길 하고 싶거든요?”

“그래 뭐, 너 답다.”
 

그래서? 라고 다음 말을 기다리는 대만이다. 태섭은 내내 뚫어져라 쳐다보던 대만의 옷깃에서 차츰 위쪽으로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쿵쿵거렸다.
 

“근데 그게 선배에요.”
 

뱉어버렸다. 태섭은 잠시 틈을 두고 숨을 쉬었고, 대만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손이 올라가나 싶더니 목 뒤를 긁는다.
 

“어?”
 

역시 한 번에 알아듣는 것은 무리가 있다. 태섭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선배를 좋아한다고요. 그것도 좀 많이.”
 

대만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손으로 얼굴 여기 저기를 문지르다가 태섭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귀끝이 붉다 못해 익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좋아한다는 게…, 그냥 마음이 잘 맞는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닌…… 거지, 이거?’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그걸 되물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대만은 테이블에 양손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침묵을 견딜 수 없어졌다.
 

“그러면, 너는…… 나랑 사귀고 싶은 거야?”

“……일단은요?”
 

멍청해빠진 대답을 해버렸다는 자각은 있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할 건가. 태섭은 대만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몸의 모든 감각으로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가능성이 없는 걸 알고 말하는 거라고 했지만 어떻게 기대감이 전혀 없을 수 있을까? 그런 건 그냥 자해다. 아무리 한없이 자해에 가까울지라도 태섭은 만에 하나라도 있을 긍정적인 신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음…….”
 

하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안에 가속도가 붙는다. 저 정대만이 아무리 사람 좋고 털털하기로서니, 자신을 성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동성을 혐오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는 말도 섞고 싶어하지 않을 만큼 역겨워해서 이 집에서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정중하게 거절당하는 것이겠지. 태섭은 역시 낮에 열심히 생각해 놓은 대로 짐을 쌀 계획을 실행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태섭이 떨리기 시작한 손을 소파에 붙이기 시작할 때쯤, 대만이 비로소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어떤 사람 하나를 그렇게까지 막 엄청 좋아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 네 기분이 어떤지 다는 모르겠는데…. 그럼 너 오늘 좀 기분 안 좋았겠다, 옷까지 골라달라고 하고.”
 

예상 밖의 이야기에 태섭은 울컥하고 주먹을 쥐었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아. 역시나.
 

“너는 마음도 엄청 잘 맞고, 같이 사는 것도 재밌고, 내가 엄청 신세도 많이 졌고 한데….”
 

쓸데없이 다정해서 이것 저것 토를 다는 중이구나. 직감적으로 깨닫고 나자 태섭은 손에 힘이 쫙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널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사귀는 건 좀 상상이 안 가긴 해.”
 

점점 대만의 말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미국에서는 그런 게 더 자유로운 건지, 아니면 그것도 그냥 내 생각이고 너가 원래 성별이 별로 상관없는 거였는지… 그런 건 내가 알 수도 없고, 너도 굳이 말할 필요 없는 거고……. 근데 나는 아직 같은 남자를 연애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거든?”
 

대만은 말을 고르면서도,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야 솔직한 것이 가장 예의바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돌려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건 비겁하다.
 

“그냥 원래대로 지내자고 하면, …안 되냐?”
 

태섭은 양손에 깍지를 끼고 낮은 소리로 작게 웃었다.
 

“안 되는 게 어딨어요.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가망 없어보이는데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적어도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대만의 얼굴에서 혐오나 경멸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우선은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태섭은 한쪽 팔로 머리를 쓸어올렸다가 귀를 만지작거렸다.
 

“선배야말로, 괜찮아요?”

“어떤 게?”

“부담스럽거나, 싫을 수 있잖아요. 일단 지금은 같이 살고 있는데, 거북할 수도 있고.”
 

대만은 잠시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만 괜찮으면.”

“괜찮지는 않아요.”
 

태섭의 대꾸에 대만이 움찔한다. 
 

“차이고 괜찮은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냥 버티는 거지.”
 

다 털어놓은 마당에 이판사판이다. 태섭은 실망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긴장이 풀려서 속마음이 줄줄 새어나오고 있는 데도 막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권은 태섭에게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다 드러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 묘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선배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요, 그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1이라도 있으면 기다릴 자신은 있어요.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기왕이면 지금처럼 가깝게 지내고 싶고요.”
 

방금 전까지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가 하얗게 되었다가 손을 떨던 안스러운 후배가 별안간 당돌해졌다. 대만은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의 모습이 원래 알던 송태섭 같다는 생각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대체 왜 어디서 어떻게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 부분은 미스테리였지만 예전부터 이녀석하고는 각별하다고 하면 각별한 부분이 있었으니, 어쩌면 훨씬 전부터 그런 감정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난 분명히 말했다. 가능성이고 뭐고 좀 무리라고.”

“누가 뭐랬어요. 그냥 기다린단 거지. 그리고 지금처럼 지내고 싶다고 한 건 선배잖아. 나도 그건 좋으니까 그냥 여기서 지낼 거고.”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이상한 희망 품지 말라니까.”

“남의 마음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구요.”

“너 그러다……,”
 

더 상처 받으면 어쩌게. 대만은 더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삐딱한 눈썹으로 투덜거리며 대꾸하고 있지만 저 태연해보이는 낯짝이 다가 아니니까. 이미 상처를 준 셈인데 거기다 소금까지 탈탈 부어넣을 필요 없지 않나.
 

“아무튼, 네 마음은 알았고, 기다리든 좋아하든 네 마음이니까 그건 너 맘대로 하고, 나한테는 너는 ‘마음이 잘 맞지만 사귀고 싶은 건 아닌’ 후배니까 난 내 맘대로 그렇게 지낸다, 그럼 됐냐?”

“넵.”
 

고개를 끄덕인 태섭을 한 번 쳐다 보고, 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자마자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이야기를 듣다니. 나름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외출하고 와서 아직 갈아입지 못한 옷을 벗고 속옷까지 챙겨 욕실로 향하자니, 문에서 문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어쩐지 확인하게 된다.
 

‘저녁 차리나 보네.’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곱슬머리 뒤통수를 보고서 후다닥 욕실로 들어간다.
 

‘뭔 생각이냐.’
 

아무리 그래도, 저 송태섭이 상대 마음이랑 상관없이 뭔 짓을 할 놈은 절대로 아니고,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그 앞에서 속옷 한 장 걸치고 온갖 옷을 다 갈아입었지 않았던가. 그전에는 아예 알몸으로 샤워실도 같이 썼었는데 이런 걸 의식할 이유가 없었다. 대만은 약간 자신이 한심해져서 물줄기를 틀기 전에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좋다고?’
 

아니 그냥 좋다는 것도 아니고 ‘좀 많이 좋아한다’고 했지.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절박함’이 있다고도 했다. 그동안 ‘우리 잘 맞을 것 같지 않아요?’ 라든가, ‘취향이에요’ 라든가, ‘전부터 사실 호감 있었어요’ 라든가 고백을 듣고 관계가 시작된 경우는 있었다. 분명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예전부터 잘 알던 사람이 강도 높은 고백을 해온 건 아무래도 처음이었다.
 

“남자도 처음……”
 

대만은 중얼거리고 자기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비슷한 걸 달고 있는 놈한테 그런 기분이 된다는 게 일단 상상이 안 가서 팔짱을 끼고 거울을 괜히 노려본다. 대만이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그 날 대만의 머리를 꽉 차지한 것은 그의 동성 후배 송태섭으로, 낮에 만나고 온 맞선 상대의 인상은 어느새 흐릿해져 있었다.


태섭대만 료미츠 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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