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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02:51
고등학생이 자취하면서 이런 거대한 인형을 방에 두다니. 용돈도 부족하고 공간도 협소한데, 들고 오는것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대협은 후회하지 않았음. 부드러운 갈색 털, 눈 아래 점처럼 작게 묻은 검은 얼룩이 누군가를 많이 닮았거든. 문구점에서 보라색과 노란색 리본끈을 사와서 꾸며주기까지 했어.


매일 밤 커다란 곰인형에 파묻혀 잠들면서 상상에 빠지곤 했지. 그를 이렇게 끌어안으면 어떤 기분일까? 솜인형처럼 푹신하진 않겠지만... 대협의 두배정도는 두툼한 허벅지와 팔뚝, 유니폼 사이로 언뜻 보이는 넓고 단단해보이는 가슴... 그대로 마주안아준다면 정말 좋을텐데... 경기중에 종종 몸이 맞닿을때가 있는데, 대협도 분명 땀나고 몸에 열이 올라있는 상태임에도 닿은 부분이 화끈거린다는 느낌을 받곤 했지. 인형보다 훨씬 따듯하고 포근할지도...


대협은 이정환을 닮은 테디베어를 집에 두고 매일 마음껏 끌어안았지만, 만족스러움과 동시에 욕망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어. 정환을 마주칠때면 끌어안고싶다, 집에 가져가고싶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게 되었지. 그러다보니 해남과의 경기에서 대협은 정말 필사적이었어. 정환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길 바랬거든. 대협은 정환을 상대하는것만으로도 벅찬데, 정환이 다른곳에 시선을 준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지금 정환을 확 끌어안아버리면 그냥 파울인줄 알고 넘어가지 않을까, 대협이 그런 고민을 하던 연습경기날이었어. 그날은 해남선수들이 능남체육관으로 와서 경기를 했지. 경기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던 도중, 대협은 해남 농구부 자켓을 발견했어. 그리고 재빠르게 숨겨버렸지. 이정환의 이름이 적혀있는걸 보자마자 그래버린거야. 이미 해남선수들은 돌아갔으니까, 만약 찾으면 돌려줘야지. 그냥 잠깐 보관하는거야. 대협은 속으로 그런 변명을 하며 경기할때보다 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어.


집에 와서 정환의 옷을 곰인형한테 걸쳐놨지. 나쁜짓을 했다는 죄책감은 묘한 희열로 바뀌었어. 어차피 아무도 모를거니까, 고백할것도 아니고 혼자 좋아하는건데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동시에 정환이 알게되면 화내거나 실망하려나 생각이 들기도 했어. 그러면 정말 많이 슬퍼질거같은데...


며칠은 조금 긴장하면서 지냈던거 같아. 농구부 활동 하다가도 혹시 해남에서 연락이 왔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별 일 없이 하루하루 흘러가서 죄책감이 점점 옅어져갔지.


그렇게 며칠이 더 흐르고, 능남과 해남의 연습경기 일정이 있는날이 돌아왔어. 이번엔 능남선수들이 해남으로 찾아갔지. 경기가 끝나고 능남선수들은 진작 돌아갔지만 대협은 몰래 남아서 해남 교정을 구경하고 있었어. 정환이 다니는 학교니까, 평소에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면서. 그러다 오늘 경기 내용도 되돌아봤지. 대협은 정환을 상대하기 이렇게 힘든 날이 없었어. 그동안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죄책감이 정환을 마주하자 다시 선명해져버렸거든. 무엇이든 꿰뚫을거같은 정환의 눈빛이 제 속을 낱낱이 파헤칠거 같아서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지. 이번 경기의 피드백 받으면서 엄청 혼나게 될거야. 그러자 절로 한숨이 나왔어.


동시에, 뺨에 차가운게 닿았어. 대협은 깜짝 놀라 돌아봤고, 정환이 음료캔을 들고 서있었지. 정환은 태연하게 대협의 손에 음료를 쥐여줬어. 얼떨결에 받아마시면서도 여전히 대협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 어리둥절해보이는 대협의 얼굴에 정환이 살포시 손을 올렸어.


어디 아픈건가 해서. 열은 없어보이는데.


이마에 닿은 손에 대협은 정말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머릿속은 엉망진창이되어버렸고,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있는지도 모르겠는걸.


괜찮아요, 어디 아픈건 아니에요..


천천히 이마에서 멀어져가는 온기에 더 닿아있었으면 이상해졌을지도 모르니까 다행히다, 싶으면서도 괜히 아쉬워졌지. 정환은 아픈건 아니라니 다행히라며, 왜 아직까지 남아있는지 물어봤어. 대협은 그냥 구경하고 있었다고 대답했지.


그냥 구경이라기엔 고민이 많아보이던데. 아까도 그렇고.


그런가요...


말하고 싶지 않다면 더 캐묻진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되니까 잘 해결되길 바라마.


내 고민이 당신이에요- 라고 절대 말 못하지. 대협은 그렇게 생각했어. 심지어 고민이 더 깊어질것만 같은걸. 어쩐지 더 복잡해져가는 대협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환은, 이만 돌아가자며 대협의 등을 격려하듯 톡톡 두들겨줬어.


날이 어두워지고 하나둘 가로등의 불빛이 켜지는 거리를 나란히 걷다가, 대협은 문득 정환에게 솔직해지고싶단 생각이 들었어. 대협이 걸음을 멈추자 정환도 걸음을 멈추고 대협을 바라봤어. 한참을 머뭇거리던 대협을, 정환은 조용히 기다려주었지.


...... 집에, 곰인형이 하나 있는데......


대협은 정말 다 말해도 되는걸까, 여전히 망설여졌어.










아니 그냥 정환이형 닮은 테디베어 끌어안고 흥냐흥냐 뒹구는 대협이가 보고싶었던건데... 뭔가 상사병앓는 대협이가 되어버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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