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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0 04:49
둘이 서로 정말 사랑하긴 하지만 아이스는 결혼 문제에만큼은 소극적이었음. 과거 매버릭의 여성편력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당연히 평생 저 하나로 만족 못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게다가 저 얼굴 좀 봐. 지금은 이렇게 자기 좋다고 매달려도 언젠가 얼굴값 톡톡히 하고 말 걸. 그 때 가서 눈물 흘리기 싫어. 뒷전으로 밀려난 본부인 역할 같은 거 싫단 말야.
매버릭은 제 프로포즈를 거절한 아이스를 이해하지 못했어. 날 사랑하는 거 아니었냐고 물으니까 사랑한대. 그럼 프로포즈가 맘에 안 들었냐고 물으니까 그것도 아니래. 그럼 대체 왜 그러냐고 뭐가 문제냐고 매버릭이 끈질기게 물어봐도 아이스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어.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매버릭이 아니지. 몇 날 며칠을 닦달한 끝에 간신히 답을 얻어냈어. 하지만 매버릭은 그 대답을 듣고 멍해졌지. 뭐라고?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매버릭의 반응은 충분히 그럴만한 것이었지. 왜냐면 아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거든.
"넌 너무 잘생겼어."
아니, 왜? 못생겨서 싫은 것도 아니고 잘생겨서 싫다고? 매버릭의 상식선에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어. 아이스가 무슨 생각인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지. 그리고 그 납득할 수 없는 이유에 자연히 이건 그냥 핑계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이 들 거야.
"아이스, 그러지 말고 진짜 뭐가 문제인지 말해 봐. 내가 다 고칠게. 다 너한테 맞출게, 응?"
그래도 아이스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을 뿐이었어.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뭐...?"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이었지만 아이스가 진심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을 거야. 이게 무슨 개같은 경우지. 매버릭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어. 청혼이 조금 성급했을지는 몰라도 분명 서로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보고 그런 터무니없는 핑계를 믿으라고.
"그럼 얼굴 뜯어고치고 오면 받아줄거야!?"
"무슨 소리야. 어디 손 댈 데가 있다고. 지구 반대편에서도 찬양할 얼굴을."
"?????"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소중하게 제 뺨을 어루만지는 아이스를 보고 매버릭은 답 없는 미궁에 빠졌어. 처음엔 얘가 날 놀리나 했는데 아무리 봐도 100% 진담이거든.
그 때부터 매버릭은 아이스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어. 아무 이유없이 무조건 잘생겼다고 싫은 건 아닐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분명 있겠지. 아이스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지만 매버릭은 꼭 알아야 했어. 고작 그런 이유로 거절당하는 건 너무 억울한걸. 차라리 아이스가 제 보잘것없는 출신이나 집안을 문제 삼았다면 납득하기 쉬웠을 거야. 힘들겠지만 아이스를 위해 제 마음을 접어보려 노력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이건...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그렇게 날마다 매버릭에게 시달리다 못해 결국 아이스가 마음 속 깊숙히 숨겨놓았던 진심을 반쯤 털어놓은 순간 매버릭은 펄쩍 뛰며 경악하겠지.
"뭐라고!?"
...네가 너무 잘생겨서 불안해, 언젠가 네가 나한테 식어서 다른 사람을 찾을까봐 무서워, 난 원래 네 취향도 아니라며, 네 잘못은 아니지만 넌 너무 잘생겼고...무수한 유혹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거야. 그런 너를 결혼으로 속박하고 싶지도 않고...무엇보다 내가 그걸 지켜볼 자신이 없어.
매버릭은 살면서 이렇게 억울하고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건 처음이었어.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내가 얼굴 믿고 바람피고 다닐 거 같아서 싫다 이거잖아?! 취향이 아니라느니 이딴 개소리는 입덕부정기 때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건데 쓸데없는 건 잘도 기억하고 있고... 그래, 내 진심이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건 그렇다 쳐. 그런데 너 지금 사돈남말 하고 있는 건 알아?
"그렇게 따지면 너도 존나 잘생겼잖아!!!"
매버릭은 울컥해서 비속어 쓰지 않기로 아이스랑 약속한 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어. 하지만 아이스는 끄떡도 않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겠지.
"난 너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진 않아, 매브."
아, 진짜 진지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 할래? 그 일방적인 예찬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아이스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어. 그런 아이스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매버릭은 의외로 아이스의 마음의 벽이 꽤 높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언제나 나에게는 아낌없이 다 주려고만 하더니. 내가 변심할까봐 이렇게나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매버릭은 아이스 모르게 손톱이 살을 파고들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어. 아이스와의 행복에 도취되어서 정작 사랑하는 그에게는 믿을만한 확신을 주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거든.
어쩔 수 없지. 다 제가 부족했던 거니까. 매버릭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아이스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했어. 아이스는 금방 변해버릴 마음이라 생각했는지 몰라도 매버릭은 말 그대로 평생을 바칠 각오로 프로포즈했던 거거든. 제가 싫어서 거절한 거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포기할 마음 없어. 내가 너한테 눈독들이는 놈들 쳐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는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너무 없어.
아이스는 한층 다정해진 매버릭의 애정공세 앞에 속절없이 마음이 허물어지고야 마는 걸 어쩔 도리가 없었어. 이런 건 다 한순간의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되뇌어보아도 고작 퇴근길의 화사한 꽃 한 다발에 녹아내리는 마음을 주워담을 수가 없었지. 매버릭이 잘해줄수록 더 이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웠지만 동시에 죽을만큼 욕심이 났어. 이 사람 내가 가지면 안 될까. 한여름밤의 꿈 같은 사랑이라도 좋으니까 잠시라도 매버릭과 영원을 맹세하면 안 될까. 게다가 매버릭이 저렇게 원하는데. 아이스는 이제까지 매버릭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들어줬어. 오로지 청혼, 그것만이 첫 거절이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야. 매버릭이 쏟아부어주는 애정에 잠식되어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수준인걸. 아이스의 마음은 점점 나중에 어떻게 되든 매버릭이 원하는대로 해주자는 쪽으로 기울어갔어. 상처를 받든 이혼을 하든 다 그 때 가서 생각하자고.
한편 아이스는 자꾸만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을 고치고 오겠다는 매버릭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어. 역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었지.
"네가 이것 때문에 불안하다며. 네가 안심할 수만 있다면 난 좀 못나게 생겨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건 매버릭의 몸에 바늘 하나 들어가는 꼴을 못 보는 아이스의 마음을 읽지 못한 잘못된 선택이었지. 또한 그 불안 심리를 거꾸로 되짚어보면 그 끝엔 누구보다 그 아름다움을 열렬히 사모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데 어떻게 그 얼굴이 망가지는 꼴을 보겠어. 결국 아이스는 매버릭의 얼굴을 끌어안고 못생겨지면 결혼 안 해 줄 거야, 하고 억지스러운 반협박을 했지. 매버릭은 ???? 싶었지만 아이스가 너무 애틋하게 자신을 꼭 안고 있어서 그냥 잠자코 있기를 택했을 거야.
물론 아이스는 매버릭의 생김새가 중요하지는 않아. 그가 얼굴에 화상을 입는다고 해도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다만 그의 신체 어디든 자기 때문에 변형되거나 훼손되는 걸 참을 수 없을 뿐이지. 다행히 매버릭은 아이스의 그 어설픈 협박 이후론 더 이상 엉뚱한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어. 그 대신 아이스를 녹여먹는 데 온 힘을 쏟기로 한 듯 싶었지. 이전에는 화르륵 불같이 붙어먹기 바빴다면 이제는 전희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아이스는 그 느려진 템포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어. 너무 과한 쾌락은 무서운거구나 깨닫기도 했고.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애정표현도 더욱 짙고 빈도가 잦아졌지. 얼굴이 빨개져서 굳어있는 아이스에게 매버릭이 씨익 웃으며 말했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지금껏 안 했을까. 나빴다 나, 그치?"
아이스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사실은 지금이 과한 거지 이전에도 절대로 부족하진 않았거든. 매버릭은 애정표현에 적극적인 편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제 쪽이 목석같았지. 그러고보면 언제부턴가 매버릭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지 꽤 됐어. 그에 관련된 얘기도 일체 하지 않았지. 그저 안에서건 밖에서건 빈틈없이 끌어안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듯이 굴었어. 그럴 때마다 가슴 벅찬 충만감이 빠듯하게 차올랐지. 아직도 그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갑자기 매버릭에 대한 신뢰가 공고해진 것도 아니고. 그건 아이스가 매버릭을 죽도록 사랑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지. 하지만 매버릭이 이렇게까지 제 마음을 보여주는데 아이스도 뭔가 해 주고 싶었어. 한 발짝이라도 용기를 내보고자 했지.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우리 집에 한 번 놀러가지 않겠냐고 하는데... 저녁식사 초대니까 사실상 인사드리러 가자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뛸 듯이 기뻐하는 매버릭 앞에서 아이스는 새빨개진 얼굴로 애인을 데려가는 건 처음이라 어떨지 모르겠다고 웅얼거리며 말했어. 매버릭은 그런 아이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연신 볼에 쪽쪽 뽀뽀해주었지.
둘 다 그 날을 가슴설레하며 손꼽아 기다렸어. 각자의 떨림과 기대를 품고 매일같이 달력을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 앞에 어떤 시련이 닥칠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시작은 두 악동들에 의해서였을 거야.
일찌감치 도착한 터라 어른들이 아무도 안 계셔서 둘이 아이스 방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데 아이스랑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닉크리스 쌍둥이 동생들이 형 애인이 왔다니까 문 벌컥 열고 들이닥쳐서 매버릭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하는 말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뭐야, 뭐 이렇게 얼굴만 반반한 알파를 데려왔어? 바람둥이같애."
"응, 한꺼번에 여자 8명씩 후리고 다녔을 것 같이 생겼어. 형아, 요즘 대세는 조신남이야."
"닉! 크리스! 너희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당장 사과해!!"
"싫은데? 어떻게 봐도 형이 아까워."
"이번만은 나도 이 새끼 말에 동감. 알파가 얼굴만 번드르르해 가지고 어따 써? 뺀질하게 생겨선 얼굴값이나 하고 다니겠지."
-얼굴값이나 하고 다니겠지.
크리스의 그 말이 제 마음속의 불안을 정곡으로 찔러서 아이스는 애들한테 더 화내지도 못하고 대충 나가라고 쌍둥이들을 밖으로 밀어낼 거야. 그리고는 차마 뒤돌아 보지도 못하고 매버릭한테 사과하겠지.
"...미안."
애들이 버릇이 없어서, 라고 말하지 못한 건 그 자신의 죄책감이 더 컸기 때문이야. 매버릭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를 믿어주기는커녕...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아이스에게 다가온 매버릭은 잘게 떨리는 몸을 뒤에서 꼭 끌어안아주었어.
"괜찮아. 네가 그만큼 날 사랑한다는 증거잖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지. 저녁 만찬장에서 매버릭은 숨막히도록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어. 매버릭과 아이스 외에 만찬에 참석한 사람은 슈슈와 시니어, 몽고메리, 그리고 리처였지. 아이스는 살짝 의아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어. 몽고메리 숙부까지는 그렇다치고 리처 선생님께서 왜...? 대외적으로는 슈슈의 먼 방계 혈족이라고 해두었지만 실은 가문의 뒷일을 처리하고 계시는 분이야. 웬만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는 무서운 이미지와는 달리 카잔스키 가의 삼형제를 친조카처럼 귀여워했어. 그런 그의 주특기는 암살, 저격, 고문이었지. 아이스의 안색이 새파래졌어. 남자친구라고 말해선 안 됐던 걸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아이스는 진심으로 매버릭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어. 그 때 슈슈가 가볍게 첫 질문을 던졌지.
"그래, 우리 주니어와는 어떻게 만났다고?"
"탑건에서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Sir!"
여기가 군대도 아닌데 이상하게 상관이 묻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매버릭은 반사적으로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대답을 했어.
"거기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내 아들을 꼬셨나?"
엄청난 압박감이 매버릭을 짓눌렀지. 아이스의 부모님이 저를 반겨 주시리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첫 만남에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실 줄은 몰랐어. 공격적인 페로몬. 별 말 안 했는데 마치 숨통을 틀어쥐고 묻는 것 같아. 당황스럽고 난처해. 그런 게 아니라고 하려던 찰나 건너편에서 수염이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은 남자가 경박스럽게 웃기 시작했지.
"거 형부 너무 애 겁주지 마쇼. 무서워서 오줌 지리겠네."
"몽고메리 자네는 입 다물고 있어."
"왜요. 내 귀여운 조카 일인데 삼촌이 나서줘야지."
슈슈와 몽고메리가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 아이스가 식탁 밑으로 몰래 매버릭의 손을 잡아줬어.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약간 축축하게 젖어있었지. 아이스는 조금 놀라고 말았어. 초음속으로 날 때도 긴장 같은 거 안 하는 애가...
"그만."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에 모든 소란이 일시에 멈췄어. 매버릭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남자를 바라보았지. 아이스가 나이를 먹으면 꼭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중후한 느낌의 중년 남성. 매버릭은 그가 바로 카잔스키 가의 가주인 톰 카잔스키 시니어일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지. 모든 결정권 또한 그에게 있을 거라는 것도.
"피트 매버릭 미첼. 탑건 차석 해군 행공대 대위. 자네에 대한 건 대충...아니, 대부분 알고 있네."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 다겠지."
몽고메리가 키득거리며 추임새를 넣었지만 시니어는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이해 바라네. 나도 우리 애가 진지한 관계라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진 안 했을 걸세."
"이해...합니다."
매버릭은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어. 뒷조사를 했다는 얘길 저렇게 당당하게 하고 있지만 상대는 아이스의 부모님이야. 참아야 해. 게다가 아이스는 이 모든 걸 하나도 몰랐다는 듯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어. 아이스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책 잡힐만한 행동을 하면 안 돼. 매버릭은 입 안쪽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어.
"결론부터 말하겠네. 자네는 우리 애와 어울리지 않아. 헤어지게."
"어머니!!"
아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시니어는 그걸 가벼운 손짓 하나로 제지했어.
"...왜인지...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매버릭이 한없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시니어에게 물었어.
"정말 몰라서 묻나? 자네 과거가 아주 화려하더군. 내 아들을 그런 난봉꾼에게 줄 수 없네. 그게 다야."
"톰을 만나고부터는 한 번도 한 눈 판 적 없습니다."
"그 전까지는 가벼운 관계만 거듭해왔고 말이지."
"......"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게 내 지론이네."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뭔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어. 귀가 멍하고 소리가 멀게 들려. 고개를 돌려 아이스를 보니 제 팔을 붙잡고 뭐라 뭐라 말하고 있는데 들리지가 않아. 아, 네 불안의 원인이 이거였겠구나. 내가 해 온 짓이 있으니 당연히 너한테도 똑같이 하리라 여겼겠구나.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던 내가 감히 너에게 평생을 입에 담았으니 네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내 죄다. 내 업보야. 하지만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는데. 정말 내 얼굴이 문제인 거라면 확 불질러 버릴 수도 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들을 어찌하나. 내게 자격이 없다고 하시지만 난 너를 놓을 수가 없는데. 너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그 때 건너편에서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어. 매버릭이 쳐다보자 몽고메리는 안경 밑으로 눈물까지 닦으며 말했어.
"아니, 충격받은 것 같은 게 너무 웃겨서. 알 거 다 알면서 왜 순진한 척이야? 보아하니 얼굴 반반한 게 장난 아니게 놀았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매버릭은 안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어. 또, 또 그놈의 얼굴 타령. 그건 이미 그에게 노이로제를 넘어 어떤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 있었어. 매버릭의 눈에 살기가 돌던 순간 아이스가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지.
"다들 왜 이러는 거에요?! 피트는 손님이에요!! 너무 무례하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제가 더 좋아한다구요...!!!"
아이스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며 오열했어. 이런 자리가 될 줄은 몰랐어.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주실 줄은. 부모님을 존경해왔는데 그마저도 배신당한 기분이야. 이럴 거면 차라리 초대하지를 마시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해. 애초에 내가 나서지를 말았어야 했어. 뛸 듯이 기뻐하던 매버릭의 얼굴이 떠오르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 미안해, 미안해, 내가 널 여기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뜨거운 눈물이 차갑게 식어가는 스테이크 위로 뚝뚝 떨어졌어.
매버릭은 그런 아이스의 옷자락을 차분히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어.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매버릭이 감정이 싹 지워진 것 같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겠지.
"전 톰 포기 못 합니다."
"허락 못한다면?"
"허락해주실만한 짓을 하겠죠."
그에 시니어의 회색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어.
"설마 혼전임신같은 진부한 방법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셨지요. 그럼 바뀐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면 어떻습니까?"
그 말에 매버릭의 뜻을 가장 먼저 알아챈 아이스가 기겁을 하며 매버릭을 붙잡고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매버릭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 시니어는 다소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매버릭을 보고 있었지.
"제가 한평생 톰만 바라보고 살 거라 믿지 못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비록 제 과거는 지워 없앨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네."
"말은 쉽지. 자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선은 이 지긋지긋한 얼굴을 갈아버릴 수 있겠지요. 제 마음을 의심받게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이자 앞으로도 두고두고 문제가 될 화근 덩어리요."
"내 아들이 흉해진 자네를 버리지 않을거라 자신하나?"
"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매버릭의 대답에 시니어는 피식 웃었어.
"무얼 믿고 그리 확신하는지...좋아, 저울에 추를 올릴 배짱 정도는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부족해. 말해 봐, 자네는 내 아들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자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면 줄 수 있겠나?"
"...비행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령 내 남편처럼 불의의 사고로 의병 제대를 해야 한다거나...뭐, 예를 들면 말일세."
시니어는 그렇게 말하며 매버릭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어. 매버릭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
"둘 다 제 목숨이니 정확히 무게가 맞겠군요.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피트!!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쳤어?! 아버지! 좀 말려주세요!! 다들 뭐하는 거에요!!!"
그 때, 이제까지 한 마디도 않던 리처가 슥 몸을 일으켰어. 분명 거구는 아닌데 압도적인 아우라가 풍기겠지. 리처가 일어나자 아이스는 정말 사색이 되어서 부모님께 마구 빌었어.
"아버지, 어머니!! 그냥 헤어질게요. 피트한테 아무짓도 하지 마세요. 제발요...제발...피트 잘못되면 저도 죽어요...!!!"
시니어는 고갯짓을 해서 사용인들에게 아이스를 데려가게 했어. 아이스의 처절한 절규와 애원이 복도를 울렸지. 슈슈가 제 손을 들어 보이며 매버릭에게 말했어.
"손가락은 세 개만 남겨도 충분하겠나?"
"세 개나 남겨주시다니 두 분처럼 해로할 수 있겠군요."
드디어 씨익 웃어보이는 매버릭의 뒤로 언제 다가온건지 리처가 거칠게 뒷덜미를 잡아챌 거야.
"애송이, 맨손으로 사람 죽여본 적 있나?"
만찬장에서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지.
*
"......?"
고문실 같은 데 끌려가서 손가락이 잘리고 얼굴이 지져졌던 것 같은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지만 오른손을 들어보니 손가락 다섯 개가 멀쩡히 다 붙어있어.
"피트! 정신이 들어?"
"아, 아이스... 이게 어떻게 된..."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이스의 부모님은 매버릭을 시험하고 싶어하셨고 몽고메리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꼽사리 낀 거고 리처는 귀여운 첫째 조카가 결혼할 사람을 데려온다니 누구보다 확실하게 심신 모두 쓸만한지 검증해주겠다고 나섰던 것이었지. 매버릭의 기억은 실감나는 액션과 소품, 약간의 환각제로 인해 환각을 진짜라고 느낀 거였고. 물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고통이 좀 가해지기는 했지. 솔직히 리처도 손가락 자른다고 했을 때 매버릭이 울면서 살려달라고 할 줄 알았거든? 근데 몇 대 맞아서 퉁퉁 부어오른 얼굴 툭툭 치면서 야, 너 진짜 후회 안 하냐? 하고 물었을 때 울기는커녕 독하게 이를 악물면서 증명할거야...모두한테... 라고 중얼거리는 거 보고 이 새끼 진짜 돌았네 싶었겠지. 전투기 파일럿 손가락을 자른다는데 미친새끼가 애인 생각밖에 없어. 벌겋게 달궈진 인두가 코 앞까지 다가와도 조금만 기다려 아이스, 이제 네가 불안해 할 일 따윈 없을 거야... 하고 오히려 후련해보이는 매버릭 보고 이거 아주 보기 드문 미친놈일세 싶어 슈슈시니어한테 좋게 말해줘야 할 지 나쁘게 말해줘야 할 지 잠깐 고민하겠지. 결국 모든 시험이 끝나고 슈슈와 시니어에게 리처가 했던 말은 이거일 듯.
"지독한 놈이야. 진짜 불구가 됐어도 첫째 아이랑 맺어주기만 했다면 기뻐했을걸. 미친놈."
슈슈시니어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만족했고 그제서야 아이스를 매버릭에게 갈 수 있도록 해주었겠지. 아이스한테는 철저히 비밀이었어서 아이스는 진짜 리처가 매버릭 어떻게 한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뛰어갔을 거야.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는 매버릭 보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정신없이 살피는데 옆에서 툭 치면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름 의사랍시고 옆에 붙어있던 몽고메리가 그 모습 보고 질렸다는 듯이 그렇게 좋으면 너네도 어디 섬에 들어가서 둘이 살아라, 하고 입털겠지. 그럼 아이스가 몽고메리 쫙 째려보는데 자긴 신나게 강건너 불구경만 (게다가 얄밉게 보태기까지) 한 게 사실이니까 은근슬쩍 시선 피하면서 휘파람이나 불 거야. 나중에 자초지종을 다 들은 아이스는 몽고메리도 쫓아내고 자기 혼자 매버릭 옆을 지키겠지. 솔직한 심정으론 부모님한테도 이게 무슨 짓이냐고 바락바락 대들고 싶은데 아직 자기한테 그들을 거역할 힘이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참는 중이야.
매버릭한테 비행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하다니. 자신은 그를 믿어주지도 못했는데. 내가 뭐라고, 나같은 게 뭐라고 네 인생을 걸어. 사랑한다면서 그깟 믿음 하나 주지 못한 나한테 왜 네 전부를 걸어...... 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나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통증에 눈물이 절로 흘러나와 침대보를 적셨어.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했을까.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도 고개를 들었지. 빨갛게 부어오른 매버릭의 뺨이 안타까워 직접 차가운 얼음 주머니를 대어주면서 아이스는 정말 하염없이 울었어. 그 와중에 조금은 기쁜 마음이 드는 자신은 최저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매버릭은 깨어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다가 아이스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것을 보고는 바로 정색하며 울었냐고 물었어. 아직 약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서 어지러울 텐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아이스는 쓰게 웃으며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어. 제 가족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제 입으로 말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지만 매버릭에겐 알 권리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자식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해도 결국엔 그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일이고 그조차도 누군가에겐 한낱 유희거리로 전락하고 만 추악한 이야기를 말야. 아이스는 매버릭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이 집안에 환멸이 나서 저를 떠나버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사람의 진심을 가지고 시험하다니 악질 중의 악질이잖아. 부모님은 흡족해하셨지만 아이스는 매버릭에게 죄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참으려 노력했지만 또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지. 뭘 잘했다고 우는지. 사랑하는 사람 하나 못 지켜놓고. 무력하게 끌려가서 방에 갇히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그 시간.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그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네가 무사하길 바라고 또 바라는 것 뿐이었지. 다시는 네가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설령 그게 내 가족이라도 용서 못 해. 네가 나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렸듯 나도 그 정도는 버릴게. 너를 위해서라면 천륜 그까짓 거 얼마든지 버릴게. 그렇게 아이스의 마음 속에 시커먼 증오와 혐오가 가득 찼을 때, 매버릭이 울고 있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목에 팔을 두르고 꼬옥 끌어안았어. 아이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직후였지.
"......?"
의아해하는 아이스를 놓아준 매버릭은 이윽고 꽃이 피듯 활짝 웃으며 말했어.
"그럼 나 합격한거네!"
아...그 미소는 진실로 행복해보이는 것이어서 아이스는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어. 시커멓게 물들어 지옥불처럼 타오르던 제 마음 속의 분노, 증오, 원망, 복수심, 혐오, 불신, 환멸은 그 순수한 미소 한 번에 거짓말처럼 말끔히 씻겨내려가버렸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리고 넌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화내지 않아?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밉지도 않아?
"...너 바보야? 자존심도 없어? 화도 안 나?"
"아이스, 난 괜찮아."
"말도 안 돼, 내가 다 치가 떨리는데..."
매버릭은 파르르 몸을 떠는 아이스의 손을 잡아주었어.
"진정해, 아이스. 자책하지도 말고."
"매브, 내가 어떻게..."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어. 아이스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어. 매버릭은 그 맘 다 안다는 듯이 잡고 있는 손을 더 꼭 힘주어 잡아주었지. 그리고는 살짝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어.
"아이스, 너 내가 손가락 몇 개 잃고 얼굴에 흉터 생기면 버릴 거야?"
그에 아이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지.
"아니지?"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네 윙맨이 되어 줄 수 없어도?"
"매브, 자꾸 그런 소리 하면 나 화낼 거야."
"대답 해 줘, 버릴 거야?"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
그러자 매버릭은 빙긋 웃으며 말했어.
"거 봐, 어떤 경우에도 너는 나를 사랑했을텐데 자책할 필요 없어. 속상해하지도 말고, 너희 부모님 원망하지도 마. 그러면 네가 힘들잖아."
"......"
"아이스, 널 만나고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어. 사실 너와 함께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이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어."
"매버릭..."
"형편없이 살았더라, 나. 제일 분한 게 뭐였냐면 내 과거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였어. 처음으로 내 자신이 더럽게 느껴지더라."
"매버릭! 아냐, 그건 아냐."
아이스가 황급히 부정했지만 매버릭은 고개를 가로저었어.
"사실은 사실이지. 하지만 난 그것 때문에 널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기보단 그동안 네가 나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앓았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넌 그런 걸 겉으로 티내는 성격이 아니잖아. 결국 네 부모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매버릭, 그게..."
"난 너한테 왜 솔직하게 전부 다 말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조차 없어. 내 애정을 쏟아붓기에만 바빠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네가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곤란한 표정을 지었는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
"네가 얼굴 때문이라는 핑계를 댔을때도 황당하긴 했지만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바보같이, 그게 전부가 아니었는데."
"매브..."
"눈 앞에서 지글거리는 인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진작 너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말해주지 못한 걸 후회했어.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나 만나며 되는대로 막 살아온 걸 후회했어. 너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박할 수가 없어서 너무 분했어."
매버릭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아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한동안 감정을 다스리던 매버릭은 다시 입을 열었어.
"아이스, 왜 내가 모든 걸 걸었을 것 같아?"
"......"
"네게 믿음을 주고 싶어서."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심장이 크게 덜컹였어. 믿음. 제가 끝끝내 그에게 주지 못했던 그것.
"그래서 내가 제일 궁금한 건 이거야."
"......?"
내심 매버릭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뻣뻣하게 굳어있는 아이스에게 깍지를 껴오며 매버릭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어.
"아직도 불안해, 아이스?"
'불안'
매버릭에게 처음 이끌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감정. 그것은 처음엔 그냥 까만 점처럼 아주 작은 티끌에 불과했지만 매버릭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또 술자리에서 원치 않게 타인의 입을 통해 그의 예전 무용담을 듣게 될 때마다 무럭무럭 그 덩치를 키웠지. 남의 말하길 좋아하는 작자들이 하는 소리고 당연히 과장된 면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외면하고 또 외면했지만 어느 날 아이스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거야. 소문이 부풀려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버릭의 과거는 아이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만큼 방종한 사생활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지난 일을 따져물을 생각은 없었어. 단지 아이스가 두려웠던 것은 처음부터 그거 하나였지. 그가 언제쯤 마음이 뜰까. 같은 사람과 3개월 이상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그와 백일 기념 케이크를 불었을 때 아이스는 행복하기보단 얼떨떨했지. 맞아, 언제든 질렸다고, 그만하자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던 게 사실이야.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그러니 여기까지 하자고, 질척거리지 말고 서로 갈 길 가자고. 그러면 그 앞에서 울어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러고보면 어쩌다 그와 사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매버릭은 분명 자기 같은 타입은 취향이 아니라고 했거든. 잠시 색다른 걸 즐겨보고 싶었나 생각하니 가슴이 욱신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하지만 아이스는 설령 그가 자신과의 만남을 잠깐의 여흥으로 생각한다 해도 먼저 놔 줄 수가 없었지. 비참하게 버려지기 전에 내가 먼저 끊어내자고 다짐했던 적도 있기야 있었지.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를 갈아치웠다던 소문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버릭은 다정했어. 로맨틱했고, 열정적이었지. 애정표현에도 거침이 없었고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속삭여주었지. 그 때마다 아이스는 죽을만큼 행복하다고 느끼면서도 매버릭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랑을 거두어가버린다면 자신은 어쩌면 좋을까 눈앞이 캄캄했어.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둘이 사귄지 1년을 넘어서 거진 2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지. 아이스는 지금 이 상황만으로 충분히 현실감이 없었어. 매버릭이랑 이렇게 오래 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 못해봤거든. 그리고 매버릭은 그동안 몇 번이나 결혼 얘기를 꺼냈었어. 자신이 말끝을 흐리자 알겠다며 금방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그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나는 걸 알면서도 아이스는 모른 척 했어. 매버릭을 사랑하지만 그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거든. 연애하다 헤어지는 것도 많이 힘들 텐데 결혼까지 했다간...감당할 자신이 없었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파경' 이런 일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어쩌면 그건 거의 자기보호 본능에 가까웠을 거야. 어떻게 해도 아이스의 머릿속엔 매버릭과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 따윈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현재의 감정까지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잖아. 오히려 이만큼이나 끌고 온 게 기적같은 걸. 가슴이 아프지만 어쩌겠어.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을 사랑해버린 죄라고 그저 모든 걸 다 제 탓으로 돌리며 그 날도 홀로 조용히 슬픔을 삭이고 말았지.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 시커먼 불안의 덩어리가 느껴지지 않았어. 언제나 아이스의 가슴 한복판에 응어리져 있던 그 암적인 존재가 말이야. 한계를 초월했기 때문일까. 매버릭을 완전히 잃을 각오를 해서? 매버릭 또한 어떤 경우에도 날 버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뭐든 상관없었어. 그토록 없애버리고 싶던 사랑하는 이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사라진 거잖아. 아이스는 이제까지 그 누구보다 그 불안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어.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었는데... 아이스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렀어.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날 위해 모든 걸 걸어준 너에게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사랑을 바칠 수 있어. 아이스는 매버릭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말했어.
"아니, 매브. 믿어. 너를 믿어.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의 환희를 매버릭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깊은 안도와 함께 차오르는 온갖 복잡한 감정에 질끈 내리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겠지. 이상하게 그토록 바라던 말인데도 마음처럼 시원스레 웃음이 나오지 않았어.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 아이스가 손을 뻗어 제 눈가를 닦아주고 나서야 매버릭은 제가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아......"
"미안해, 매브. 이제서야 말할 수 있어서 미안해. 널 믿지 못해서, 널 시험해서, 네게 이 모든 걸 겪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딱 오늘까지만 미안해할게.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내게 청혼해줄래?"
"지금? 반지도 꽃도 아무것도 없는데?"
"너만 있으면 돼. 네가 안 하면 내가 한다?"
"뭐어? 안 돼. 나 좀 일으켜 줘."
대체 무슨 약을 쓴 건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며 투덜거리는 매버릭을 아이스는 소리없이 웃으며 부축해 일으켰어. 막상 하려니 쑥쓰러운지 큼큼대는 매버릭이 너무 귀여워.
"아씨...나중에 꼭 다시 할 거야. 알겠지?"
"알았으니까 빨리."
아이스의 재촉에 매버릭은 급한대로 아이스의 왼손 약지에 키스하며 말했어. 아무것도 없으니 어쩔 수 있나.
"사랑해, 톰. 나와 결혼해 줘."
아이스는 대답 대신 몸을 던져 매버릭을 와락 끌어안았어. 둘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데굴데굴 구를 만큼.
"뭐야, 너. 대답은 안 하고."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아이스는 장난기 가득하게 웃으면서 매버릭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어. 이렇게 해맑게 웃는 건 처음봐서 애틋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겠지. 왜 진작 이렇게 못해줬을까. 난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넌 내가 모르는 곳에서 울었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넌 오로지 행복하기만 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아이스, 네 믿음에 보답할게.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내가 얼마나 너한테 미쳐있는지 평생에 걸쳐서 증명할게. 사랑해, 톰. 내 하늘과 맞바꿀만큼.
매브아이스
슈슈시니어
슈슈와 시니어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라 삼형제 모두 카잔스키 성만 이어받음
그리고 아이스를 만나기 전의 매버릭은 굉장히 냉소적인 성격이었음
ㅈㅇㅁㅇ
매버릭은 제 프로포즈를 거절한 아이스를 이해하지 못했어. 날 사랑하는 거 아니었냐고 물으니까 사랑한대. 그럼 프로포즈가 맘에 안 들었냐고 물으니까 그것도 아니래. 그럼 대체 왜 그러냐고 뭐가 문제냐고 매버릭이 끈질기게 물어봐도 아이스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어.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매버릭이 아니지. 몇 날 며칠을 닦달한 끝에 간신히 답을 얻어냈어. 하지만 매버릭은 그 대답을 듣고 멍해졌지. 뭐라고?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매버릭의 반응은 충분히 그럴만한 것이었지. 왜냐면 아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했거든.
"넌 너무 잘생겼어."
아니, 왜? 못생겨서 싫은 것도 아니고 잘생겨서 싫다고? 매버릭의 상식선에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어. 아이스가 무슨 생각인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지. 그리고 그 납득할 수 없는 이유에 자연히 이건 그냥 핑계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거란 생각이 들 거야.
"아이스, 그러지 말고 진짜 뭐가 문제인지 말해 봐. 내가 다 고칠게. 다 너한테 맞출게, 응?"
그래도 아이스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을 뿐이었어.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뭐...?"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이었지만 아이스가 진심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을 거야. 이게 무슨 개같은 경우지. 매버릭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어. 청혼이 조금 성급했을지는 몰라도 분명 서로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나보고 그런 터무니없는 핑계를 믿으라고.
"그럼 얼굴 뜯어고치고 오면 받아줄거야!?"
"무슨 소리야. 어디 손 댈 데가 있다고. 지구 반대편에서도 찬양할 얼굴을."
"?????"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소중하게 제 뺨을 어루만지는 아이스를 보고 매버릭은 답 없는 미궁에 빠졌어. 처음엔 얘가 날 놀리나 했는데 아무리 봐도 100% 진담이거든.
그 때부터 매버릭은 아이스를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어. 아무 이유없이 무조건 잘생겼다고 싫은 건 아닐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분명 있겠지. 아이스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지만 매버릭은 꼭 알아야 했어. 고작 그런 이유로 거절당하는 건 너무 억울한걸. 차라리 아이스가 제 보잘것없는 출신이나 집안을 문제 삼았다면 납득하기 쉬웠을 거야. 힘들겠지만 아이스를 위해 제 마음을 접어보려 노력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이건...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그렇게 날마다 매버릭에게 시달리다 못해 결국 아이스가 마음 속 깊숙히 숨겨놓았던 진심을 반쯤 털어놓은 순간 매버릭은 펄쩍 뛰며 경악하겠지.
"뭐라고!?"
...네가 너무 잘생겨서 불안해, 언젠가 네가 나한테 식어서 다른 사람을 찾을까봐 무서워, 난 원래 네 취향도 아니라며, 네 잘못은 아니지만 넌 너무 잘생겼고...무수한 유혹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거야. 그런 너를 결혼으로 속박하고 싶지도 않고...무엇보다 내가 그걸 지켜볼 자신이 없어.
매버릭은 살면서 이렇게 억울하고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건 처음이었어.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내가 얼굴 믿고 바람피고 다닐 거 같아서 싫다 이거잖아?! 취향이 아니라느니 이딴 개소리는 입덕부정기 때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건데 쓸데없는 건 잘도 기억하고 있고... 그래, 내 진심이 조금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건 그렇다 쳐. 그런데 너 지금 사돈남말 하고 있는 건 알아?
"그렇게 따지면 너도 존나 잘생겼잖아!!!"
매버릭은 울컥해서 비속어 쓰지 않기로 아이스랑 약속한 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질렀어. 하지만 아이스는 끄떡도 않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겠지.
"난 너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진 않아, 매브."
아, 진짜 진지한 얼굴로 이상한 소리 할래? 그 일방적인 예찬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아이스는 정말 모르는 것 같았어. 그런 아이스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매버릭은 의외로 아이스의 마음의 벽이 꽤 높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언제나 나에게는 아낌없이 다 주려고만 하더니. 내가 변심할까봐 이렇게나 두려워하고 있었구나. 매버릭은 아이스 모르게 손톱이 살을 파고들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어. 아이스와의 행복에 도취되어서 정작 사랑하는 그에게는 믿을만한 확신을 주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거든.
어쩔 수 없지. 다 제가 부족했던 거니까. 매버릭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아이스에게 정성을 쏟기 시작했어. 아이스는 금방 변해버릴 마음이라 생각했는지 몰라도 매버릭은 말 그대로 평생을 바칠 각오로 프로포즈했던 거거든. 제가 싫어서 거절한 거라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포기할 마음 없어. 내가 너한테 눈독들이는 놈들 쳐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는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너무 없어.
아이스는 한층 다정해진 매버릭의 애정공세 앞에 속절없이 마음이 허물어지고야 마는 걸 어쩔 도리가 없었어. 이런 건 다 한순간의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되뇌어보아도 고작 퇴근길의 화사한 꽃 한 다발에 녹아내리는 마음을 주워담을 수가 없었지. 매버릭이 잘해줄수록 더 이 행복이 깨질까봐 두려웠지만 동시에 죽을만큼 욕심이 났어. 이 사람 내가 가지면 안 될까. 한여름밤의 꿈 같은 사랑이라도 좋으니까 잠시라도 매버릭과 영원을 맹세하면 안 될까. 게다가 매버릭이 저렇게 원하는데. 아이스는 이제까지 매버릭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들어줬어. 오로지 청혼, 그것만이 첫 거절이었지.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야. 매버릭이 쏟아부어주는 애정에 잠식되어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수준인걸. 아이스의 마음은 점점 나중에 어떻게 되든 매버릭이 원하는대로 해주자는 쪽으로 기울어갔어. 상처를 받든 이혼을 하든 다 그 때 가서 생각하자고.
한편 아이스는 자꾸만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을 고치고 오겠다는 매버릭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어. 역시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사무치게 들었지.
"네가 이것 때문에 불안하다며. 네가 안심할 수만 있다면 난 좀 못나게 생겨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건 매버릭의 몸에 바늘 하나 들어가는 꼴을 못 보는 아이스의 마음을 읽지 못한 잘못된 선택이었지. 또한 그 불안 심리를 거꾸로 되짚어보면 그 끝엔 누구보다 그 아름다움을 열렬히 사모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데 어떻게 그 얼굴이 망가지는 꼴을 보겠어. 결국 아이스는 매버릭의 얼굴을 끌어안고 못생겨지면 결혼 안 해 줄 거야, 하고 억지스러운 반협박을 했지. 매버릭은 ???? 싶었지만 아이스가 너무 애틋하게 자신을 꼭 안고 있어서 그냥 잠자코 있기를 택했을 거야.
물론 아이스는 매버릭의 생김새가 중요하지는 않아. 그가 얼굴에 화상을 입는다고 해도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다만 그의 신체 어디든 자기 때문에 변형되거나 훼손되는 걸 참을 수 없을 뿐이지. 다행히 매버릭은 아이스의 그 어설픈 협박 이후론 더 이상 엉뚱한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어. 그 대신 아이스를 녹여먹는 데 온 힘을 쏟기로 한 듯 싶었지. 이전에는 화르륵 불같이 붙어먹기 바빴다면 이제는 전희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아이스는 그 느려진 템포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어. 너무 과한 쾌락은 무서운거구나 깨닫기도 했고.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애정표현도 더욱 짙고 빈도가 잦아졌지. 얼굴이 빨개져서 굳어있는 아이스에게 매버릭이 씨익 웃으며 말했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지금껏 안 했을까. 나빴다 나, 그치?"
아이스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사실은 지금이 과한 거지 이전에도 절대로 부족하진 않았거든. 매버릭은 애정표현에 적극적인 편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제 쪽이 목석같았지. 그러고보면 언제부턴가 매버릭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지 꽤 됐어. 그에 관련된 얘기도 일체 하지 않았지. 그저 안에서건 밖에서건 빈틈없이 끌어안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듯이 굴었어. 그럴 때마다 가슴 벅찬 충만감이 빠듯하게 차올랐지. 아직도 그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야. 갑자기 매버릭에 대한 신뢰가 공고해진 것도 아니고. 그건 아이스가 매버릭을 죽도록 사랑하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지. 하지만 매버릭이 이렇게까지 제 마음을 보여주는데 아이스도 뭔가 해 주고 싶었어. 한 발짝이라도 용기를 내보고자 했지.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우리 집에 한 번 놀러가지 않겠냐고 하는데... 저녁식사 초대니까 사실상 인사드리러 가자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뛸 듯이 기뻐하는 매버릭 앞에서 아이스는 새빨개진 얼굴로 애인을 데려가는 건 처음이라 어떨지 모르겠다고 웅얼거리며 말했어. 매버릭은 그런 아이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연신 볼에 쪽쪽 뽀뽀해주었지.
둘 다 그 날을 가슴설레하며 손꼽아 기다렸어. 각자의 떨림과 기대를 품고 매일같이 달력을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 앞에 어떤 시련이 닥칠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시작은 두 악동들에 의해서였을 거야.
일찌감치 도착한 터라 어른들이 아무도 안 계셔서 둘이 아이스 방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데 아이스랑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닉크리스 쌍둥이 동생들이 형 애인이 왔다니까 문 벌컥 열고 들이닥쳐서 매버릭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하는 말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뭐야, 뭐 이렇게 얼굴만 반반한 알파를 데려왔어? 바람둥이같애."
"응, 한꺼번에 여자 8명씩 후리고 다녔을 것 같이 생겼어. 형아, 요즘 대세는 조신남이야."
"닉! 크리스! 너희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당장 사과해!!"
"싫은데? 어떻게 봐도 형이 아까워."
"이번만은 나도 이 새끼 말에 동감. 알파가 얼굴만 번드르르해 가지고 어따 써? 뺀질하게 생겨선 얼굴값이나 하고 다니겠지."
-얼굴값이나 하고 다니겠지.
크리스의 그 말이 제 마음속의 불안을 정곡으로 찔러서 아이스는 애들한테 더 화내지도 못하고 대충 나가라고 쌍둥이들을 밖으로 밀어낼 거야. 그리고는 차마 뒤돌아 보지도 못하고 매버릭한테 사과하겠지.
"...미안."
애들이 버릇이 없어서, 라고 말하지 못한 건 그 자신의 죄책감이 더 컸기 때문이야. 매버릭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를 믿어주기는커녕...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아이스에게 다가온 매버릭은 잘게 떨리는 몸을 뒤에서 꼭 끌어안아주었어.
"괜찮아. 네가 그만큼 날 사랑한다는 증거잖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지. 저녁 만찬장에서 매버릭은 숨막히도록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어. 매버릭과 아이스 외에 만찬에 참석한 사람은 슈슈와 시니어, 몽고메리, 그리고 리처였지. 아이스는 살짝 의아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어. 몽고메리 숙부까지는 그렇다치고 리처 선생님께서 왜...? 대외적으로는 슈슈의 먼 방계 혈족이라고 해두었지만 실은 가문의 뒷일을 처리하고 계시는 분이야. 웬만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분인데... 그는 무서운 이미지와는 달리 카잔스키 가의 삼형제를 친조카처럼 귀여워했어. 그런 그의 주특기는 암살, 저격, 고문이었지. 아이스의 안색이 새파래졌어. 남자친구라고 말해선 안 됐던 걸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아이스는 진심으로 매버릭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어. 그 때 슈슈가 가볍게 첫 질문을 던졌지.
"그래, 우리 주니어와는 어떻게 만났다고?"
"탑건에서 처음 만나게 됐습니다, Sir!"
여기가 군대도 아닌데 이상하게 상관이 묻는 것 같은 느낌이라서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던 매버릭은 반사적으로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대답을 했어.
"거기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내 아들을 꼬셨나?"
엄청난 압박감이 매버릭을 짓눌렀지. 아이스의 부모님이 저를 반겨 주시리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첫 만남에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실 줄은 몰랐어. 공격적인 페로몬. 별 말 안 했는데 마치 숨통을 틀어쥐고 묻는 것 같아. 당황스럽고 난처해. 그런 게 아니라고 하려던 찰나 건너편에서 수염이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은 남자가 경박스럽게 웃기 시작했지.
"거 형부 너무 애 겁주지 마쇼. 무서워서 오줌 지리겠네."
"몽고메리 자네는 입 다물고 있어."
"왜요. 내 귀여운 조카 일인데 삼촌이 나서줘야지."
슈슈와 몽고메리가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 아이스가 식탁 밑으로 몰래 매버릭의 손을 잡아줬어.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약간 축축하게 젖어있었지. 아이스는 조금 놀라고 말았어. 초음속으로 날 때도 긴장 같은 거 안 하는 애가...
"그만."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에 모든 소란이 일시에 멈췄어. 매버릭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남자를 바라보았지. 아이스가 나이를 먹으면 꼭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중후한 느낌의 중년 남성. 매버릭은 그가 바로 카잔스키 가의 가주인 톰 카잔스키 시니어일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지. 모든 결정권 또한 그에게 있을 거라는 것도.
"피트 매버릭 미첼. 탑건 차석 해군 행공대 대위. 자네에 대한 건 대충...아니, 대부분 알고 있네."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 다겠지."
몽고메리가 키득거리며 추임새를 넣었지만 시니어는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이해 바라네. 나도 우리 애가 진지한 관계라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진 안 했을 걸세."
"이해...합니다."
매버릭은 주먹을 꽉 쥐며 대답했어. 뒷조사를 했다는 얘길 저렇게 당당하게 하고 있지만 상대는 아이스의 부모님이야. 참아야 해. 게다가 아이스는 이 모든 걸 하나도 몰랐다는 듯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어. 아이스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책 잡힐만한 행동을 하면 안 돼. 매버릭은 입 안쪽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어.
"결론부터 말하겠네. 자네는 우리 애와 어울리지 않아. 헤어지게."
"어머니!!"
아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시니어는 그걸 가벼운 손짓 하나로 제지했어.
"...왜인지...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매버릭이 한없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시니어에게 물었어.
"정말 몰라서 묻나? 자네 과거가 아주 화려하더군. 내 아들을 그런 난봉꾼에게 줄 수 없네. 그게 다야."
"톰을 만나고부터는 한 번도 한 눈 판 적 없습니다."
"그 전까지는 가벼운 관계만 거듭해왔고 말이지."
"......"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게 내 지론이네."
사형선고를 받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뭔가가 쿵, 하고 내려앉았어. 귀가 멍하고 소리가 멀게 들려. 고개를 돌려 아이스를 보니 제 팔을 붙잡고 뭐라 뭐라 말하고 있는데 들리지가 않아. 아, 네 불안의 원인이 이거였겠구나. 내가 해 온 짓이 있으니 당연히 너한테도 똑같이 하리라 여겼겠구나. 가볍게 만나고 헤어지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던 내가 감히 너에게 평생을 입에 담았으니 네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내 죄다. 내 업보야. 하지만 과거는 돌이킬 수가 없는데. 정말 내 얼굴이 문제인 거라면 확 불질러 버릴 수도 있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들을 어찌하나. 내게 자격이 없다고 하시지만 난 너를 놓을 수가 없는데. 너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그 때 건너편에서 재밌다는 듯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어. 매버릭이 쳐다보자 몽고메리는 안경 밑으로 눈물까지 닦으며 말했어.
"아니, 충격받은 것 같은 게 너무 웃겨서. 알 거 다 알면서 왜 순진한 척이야? 보아하니 얼굴 반반한 게 장난 아니게 놀았을 것 같은데."
그 순간 매버릭은 안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어. 또, 또 그놈의 얼굴 타령. 그건 이미 그에게 노이로제를 넘어 어떤 하나의 트리거가 되어 있었어. 매버릭의 눈에 살기가 돌던 순간 아이스가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지.
"다들 왜 이러는 거에요?! 피트는 손님이에요!! 너무 무례하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제가 더 좋아한다구요...!!!"
아이스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며 오열했어. 이런 자리가 될 줄은 몰랐어. 이렇게 대놓고 모욕을 주실 줄은. 부모님을 존경해왔는데 그마저도 배신당한 기분이야. 이럴 거면 차라리 초대하지를 마시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해. 애초에 내가 나서지를 말았어야 했어. 뛸 듯이 기뻐하던 매버릭의 얼굴이 떠오르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어. 미안해, 미안해, 내가 널 여기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뜨거운 눈물이 차갑게 식어가는 스테이크 위로 뚝뚝 떨어졌어.
매버릭은 그런 아이스의 옷자락을 차분히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어.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매버릭이 감정이 싹 지워진 것 같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겠지.
"전 톰 포기 못 합니다."
"허락 못한다면?"
"허락해주실만한 짓을 하겠죠."
그에 시니어의 회색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어.
"설마 혼전임신같은 진부한 방법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셨지요. 그럼 바뀐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면 어떻습니까?"
그 말에 매버릭의 뜻을 가장 먼저 알아챈 아이스가 기겁을 하며 매버릭을 붙잡고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매버릭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 시니어는 다소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매버릭을 보고 있었지.
"제가 한평생 톰만 바라보고 살 거라 믿지 못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비록 제 과거는 지워 없앨 수 없지만 그 외에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네."
"말은 쉽지. 자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선은 이 지긋지긋한 얼굴을 갈아버릴 수 있겠지요. 제 마음을 의심받게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이자 앞으로도 두고두고 문제가 될 화근 덩어리요."
"내 아들이 흉해진 자네를 버리지 않을거라 자신하나?"
"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매버릭의 대답에 시니어는 피식 웃었어.
"무얼 믿고 그리 확신하는지...좋아, 저울에 추를 올릴 배짱 정도는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부족해. 말해 봐, 자네는 내 아들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자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면 줄 수 있겠나?"
"...비행 말씀이십니까."
"그래, 가령 내 남편처럼 불의의 사고로 의병 제대를 해야 한다거나...뭐, 예를 들면 말일세."
시니어는 그렇게 말하며 매버릭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어. 매버릭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
"둘 다 제 목숨이니 정확히 무게가 맞겠군요.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피트!!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미쳤어?! 아버지! 좀 말려주세요!! 다들 뭐하는 거에요!!!"
그 때, 이제까지 한 마디도 않던 리처가 슥 몸을 일으켰어. 분명 거구는 아닌데 압도적인 아우라가 풍기겠지. 리처가 일어나자 아이스는 정말 사색이 되어서 부모님께 마구 빌었어.
"아버지, 어머니!! 그냥 헤어질게요. 피트한테 아무짓도 하지 마세요. 제발요...제발...피트 잘못되면 저도 죽어요...!!!"
시니어는 고갯짓을 해서 사용인들에게 아이스를 데려가게 했어. 아이스의 처절한 절규와 애원이 복도를 울렸지. 슈슈가 제 손을 들어 보이며 매버릭에게 말했어.
"손가락은 세 개만 남겨도 충분하겠나?"
"세 개나 남겨주시다니 두 분처럼 해로할 수 있겠군요."
드디어 씨익 웃어보이는 매버릭의 뒤로 언제 다가온건지 리처가 거칠게 뒷덜미를 잡아챌 거야.
"애송이, 맨손으로 사람 죽여본 적 있나?"
만찬장에서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지.
*
"......?"
고문실 같은 데 끌려가서 손가락이 잘리고 얼굴이 지져졌던 것 같은데...? 힘이 잘 들어가지 않지만 오른손을 들어보니 손가락 다섯 개가 멀쩡히 다 붙어있어.
"피트! 정신이 들어?"
"아, 아이스... 이게 어떻게 된..."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이스의 부모님은 매버릭을 시험하고 싶어하셨고 몽고메리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꼽사리 낀 거고 리처는 귀여운 첫째 조카가 결혼할 사람을 데려온다니 누구보다 확실하게 심신 모두 쓸만한지 검증해주겠다고 나섰던 것이었지. 매버릭의 기억은 실감나는 액션과 소품, 약간의 환각제로 인해 환각을 진짜라고 느낀 거였고. 물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고통이 좀 가해지기는 했지. 솔직히 리처도 손가락 자른다고 했을 때 매버릭이 울면서 살려달라고 할 줄 알았거든? 근데 몇 대 맞아서 퉁퉁 부어오른 얼굴 툭툭 치면서 야, 너 진짜 후회 안 하냐? 하고 물었을 때 울기는커녕 독하게 이를 악물면서 증명할거야...모두한테... 라고 중얼거리는 거 보고 이 새끼 진짜 돌았네 싶었겠지. 전투기 파일럿 손가락을 자른다는데 미친새끼가 애인 생각밖에 없어. 벌겋게 달궈진 인두가 코 앞까지 다가와도 조금만 기다려 아이스, 이제 네가 불안해 할 일 따윈 없을 거야... 하고 오히려 후련해보이는 매버릭 보고 이거 아주 보기 드문 미친놈일세 싶어 슈슈시니어한테 좋게 말해줘야 할 지 나쁘게 말해줘야 할 지 잠깐 고민하겠지. 결국 모든 시험이 끝나고 슈슈와 시니어에게 리처가 했던 말은 이거일 듯.
"지독한 놈이야. 진짜 불구가 됐어도 첫째 아이랑 맺어주기만 했다면 기뻐했을걸. 미친놈."
슈슈시니어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만족했고 그제서야 아이스를 매버릭에게 갈 수 있도록 해주었겠지. 아이스한테는 철저히 비밀이었어서 아이스는 진짜 리처가 매버릭 어떻게 한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뛰어갔을 거야. 정신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는 매버릭 보고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정신없이 살피는데 옆에서 툭 치면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나름 의사랍시고 옆에 붙어있던 몽고메리가 그 모습 보고 질렸다는 듯이 그렇게 좋으면 너네도 어디 섬에 들어가서 둘이 살아라, 하고 입털겠지. 그럼 아이스가 몽고메리 쫙 째려보는데 자긴 신나게 강건너 불구경만 (게다가 얄밉게 보태기까지) 한 게 사실이니까 은근슬쩍 시선 피하면서 휘파람이나 불 거야. 나중에 자초지종을 다 들은 아이스는 몽고메리도 쫓아내고 자기 혼자 매버릭 옆을 지키겠지. 솔직한 심정으론 부모님한테도 이게 무슨 짓이냐고 바락바락 대들고 싶은데 아직 자기한테 그들을 거역할 힘이 없다는 걸 잘 알아서 참는 중이야.
매버릭한테 비행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데 그걸 포기하겠다고 하다니. 자신은 그를 믿어주지도 못했는데. 내가 뭐라고, 나같은 게 뭐라고 네 인생을 걸어. 사랑한다면서 그깟 믿음 하나 주지 못한 나한테 왜 네 전부를 걸어...... 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나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통증에 눈물이 절로 흘러나와 침대보를 적셨어.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했을까.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도 고개를 들었지. 빨갛게 부어오른 매버릭의 뺨이 안타까워 직접 차가운 얼음 주머니를 대어주면서 아이스는 정말 하염없이 울었어. 그 와중에 조금은 기쁜 마음이 드는 자신은 최저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매버릭은 깨어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다가 아이스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것을 보고는 바로 정색하며 울었냐고 물었어. 아직 약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서 어지러울 텐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아이스는 쓰게 웃으며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어. 제 가족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제 입으로 말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지만 매버릭에겐 알 권리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자식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해도 결국엔 그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일이고 그조차도 누군가에겐 한낱 유희거리로 전락하고 만 추악한 이야기를 말야. 아이스는 매버릭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이 집안에 환멸이 나서 저를 떠나버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사람의 진심을 가지고 시험하다니 악질 중의 악질이잖아. 부모님은 흡족해하셨지만 아이스는 매버릭에게 죄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참으려 노력했지만 또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지. 뭘 잘했다고 우는지. 사랑하는 사람 하나 못 지켜놓고. 무력하게 끌려가서 방에 갇히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그 시간.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그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네가 무사하길 바라고 또 바라는 것 뿐이었지. 다시는 네가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설령 그게 내 가족이라도 용서 못 해. 네가 나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렸듯 나도 그 정도는 버릴게. 너를 위해서라면 천륜 그까짓 거 얼마든지 버릴게. 그렇게 아이스의 마음 속에 시커먼 증오와 혐오가 가득 찼을 때, 매버릭이 울고 있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목에 팔을 두르고 꼬옥 끌어안았어. 아이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직후였지.
"......?"
의아해하는 아이스를 놓아준 매버릭은 이윽고 꽃이 피듯 활짝 웃으며 말했어.
"그럼 나 합격한거네!"
아...그 미소는 진실로 행복해보이는 것이어서 아이스는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어. 시커멓게 물들어 지옥불처럼 타오르던 제 마음 속의 분노, 증오, 원망, 복수심, 혐오, 불신, 환멸은 그 순수한 미소 한 번에 거짓말처럼 말끔히 씻겨내려가버렸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리고 넌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하고도 화내지 않아?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는데 내가 밉지도 않아?
"...너 바보야? 자존심도 없어? 화도 안 나?"
"아이스, 난 괜찮아."
"말도 안 돼, 내가 다 치가 떨리는데..."
매버릭은 파르르 몸을 떠는 아이스의 손을 잡아주었어.
"진정해, 아이스. 자책하지도 말고."
"매브, 내가 어떻게..."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어. 아이스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어. 매버릭은 그 맘 다 안다는 듯이 잡고 있는 손을 더 꼭 힘주어 잡아주었지. 그리고는 살짝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어.
"아이스, 너 내가 손가락 몇 개 잃고 얼굴에 흉터 생기면 버릴 거야?"
그에 아이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지.
"아니지?"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네 윙맨이 되어 줄 수 없어도?"
"매브, 자꾸 그런 소리 하면 나 화낼 거야."
"대답 해 줘, 버릴 거야?"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
그러자 매버릭은 빙긋 웃으며 말했어.
"거 봐, 어떤 경우에도 너는 나를 사랑했을텐데 자책할 필요 없어. 속상해하지도 말고, 너희 부모님 원망하지도 마. 그러면 네가 힘들잖아."
"......"
"아이스, 널 만나고 내 삶은 완전히 바뀌었어. 사실 너와 함께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이전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어."
"매버릭..."
"형편없이 살았더라, 나. 제일 분한 게 뭐였냐면 내 과거에 대해 부정할 수 없다는 거였어. 처음으로 내 자신이 더럽게 느껴지더라."
"매버릭! 아냐, 그건 아냐."
아이스가 황급히 부정했지만 매버릭은 고개를 가로저었어.
"사실은 사실이지. 하지만 난 그것 때문에 널 가질 수 없다는 것에 절망하기보단 그동안 네가 나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 앓았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넌 그런 걸 겉으로 티내는 성격이 아니잖아. 결국 네 부모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매버릭, 그게..."
"난 너한테 왜 솔직하게 전부 다 말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조차 없어. 내 애정을 쏟아붓기에만 바빠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네가 왜 결혼 얘기만 나오면 곤란한 표정을 지었는지,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
"네가 얼굴 때문이라는 핑계를 댔을때도 황당하긴 했지만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바보같이, 그게 전부가 아니었는데."
"매브..."
"눈 앞에서 지글거리는 인두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진작 너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말해주지 못한 걸 후회했어. 이 사람 저 사람 아무나 만나며 되는대로 막 살아온 걸 후회했어. 너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박할 수가 없어서 너무 분했어."
매버릭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아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한동안 감정을 다스리던 매버릭은 다시 입을 열었어.
"아이스, 왜 내가 모든 걸 걸었을 것 같아?"
"......"
"네게 믿음을 주고 싶어서."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심장이 크게 덜컹였어. 믿음. 제가 끝끝내 그에게 주지 못했던 그것.
"그래서 내가 제일 궁금한 건 이거야."
"......?"
내심 매버릭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뻣뻣하게 굳어있는 아이스에게 깍지를 껴오며 매버릭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어.
"아직도 불안해, 아이스?"
'불안'
매버릭에게 처음 이끌렸을 때부터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감정. 그것은 처음엔 그냥 까만 점처럼 아주 작은 티끌에 불과했지만 매버릭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또 술자리에서 원치 않게 타인의 입을 통해 그의 예전 무용담을 듣게 될 때마다 무럭무럭 그 덩치를 키웠지. 남의 말하길 좋아하는 작자들이 하는 소리고 당연히 과장된 면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외면하고 또 외면했지만 어느 날 아이스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거야. 소문이 부풀려진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버릭의 과거는 아이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만큼 방종한 사생활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지난 일을 따져물을 생각은 없었어. 단지 아이스가 두려웠던 것은 처음부터 그거 하나였지. 그가 언제쯤 마음이 뜰까. 같은 사람과 3개월 이상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그와 백일 기념 케이크를 불었을 때 아이스는 행복하기보단 얼떨떨했지. 맞아, 언제든 질렸다고, 그만하자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던 게 사실이야.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그러니 여기까지 하자고, 질척거리지 말고 서로 갈 길 가자고. 그러면 그 앞에서 울어버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러고보면 어쩌다 그와 사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 매버릭은 분명 자기 같은 타입은 취향이 아니라고 했거든. 잠시 색다른 걸 즐겨보고 싶었나 생각하니 가슴이 욱신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하지만 아이스는 설령 그가 자신과의 만남을 잠깐의 여흥으로 생각한다 해도 먼저 놔 줄 수가 없었지. 비참하게 버려지기 전에 내가 먼저 끊어내자고 다짐했던 적도 있기야 있었지.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를 갈아치웠다던 소문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매버릭은 다정했어. 로맨틱했고, 열정적이었지. 애정표현에도 거침이 없었고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속삭여주었지. 그 때마다 아이스는 죽을만큼 행복하다고 느끼면서도 매버릭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사랑을 거두어가버린다면 자신은 어쩌면 좋을까 눈앞이 캄캄했어.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둘이 사귄지 1년을 넘어서 거진 2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지. 아이스는 지금 이 상황만으로 충분히 현실감이 없었어. 매버릭이랑 이렇게 오래 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 못해봤거든. 그리고 매버릭은 그동안 몇 번이나 결혼 얘기를 꺼냈었어. 자신이 말끝을 흐리자 알겠다며 금방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그 얼굴에 씁쓸함이 묻어나는 걸 알면서도 아이스는 모른 척 했어. 매버릭을 사랑하지만 그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거든. 연애하다 헤어지는 것도 많이 힘들 텐데 결혼까지 했다간...감당할 자신이 없었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처럼 '결혼한 지 1년도 안 되어서 파경' 이런 일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어쩌면 그건 거의 자기보호 본능에 가까웠을 거야. 어떻게 해도 아이스의 머릿속엔 매버릭과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 따윈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현재의 감정까지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잖아. 오히려 이만큼이나 끌고 온 게 기적같은 걸. 가슴이 아프지만 어쩌겠어.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을 사랑해버린 죄라고 그저 모든 걸 다 제 탓으로 돌리며 그 날도 홀로 조용히 슬픔을 삭이고 말았지.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 시커먼 불안의 덩어리가 느껴지지 않았어. 언제나 아이스의 가슴 한복판에 응어리져 있던 그 암적인 존재가 말이야. 한계를 초월했기 때문일까. 매버릭을 완전히 잃을 각오를 해서? 매버릭 또한 어떤 경우에도 날 버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뭐든 상관없었어. 그토록 없애버리고 싶던 사랑하는 이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사라진 거잖아. 아이스는 이제까지 그 누구보다 그 불안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어.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었는데... 아이스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렀어. 이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날 위해 모든 걸 걸어준 너에게 반쪽짜리가 아닌 온전한 사랑을 바칠 수 있어. 아이스는 매버릭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말했어.
"아니, 매브. 믿어. 너를 믿어.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
그 말을 듣는 순간의 환희를 매버릭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깊은 안도와 함께 차오르는 온갖 복잡한 감정에 질끈 내리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겠지. 이상하게 그토록 바라던 말인데도 마음처럼 시원스레 웃음이 나오지 않았어.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 아이스가 손을 뻗어 제 눈가를 닦아주고 나서야 매버릭은 제가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아......"
"미안해, 매브. 이제서야 말할 수 있어서 미안해. 널 믿지 못해서, 널 시험해서, 네게 이 모든 걸 겪게 해서 미안해."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딱 오늘까지만 미안해할게.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내게 청혼해줄래?"
"지금? 반지도 꽃도 아무것도 없는데?"
"너만 있으면 돼. 네가 안 하면 내가 한다?"
"뭐어? 안 돼. 나 좀 일으켜 줘."
대체 무슨 약을 쓴 건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며 투덜거리는 매버릭을 아이스는 소리없이 웃으며 부축해 일으켰어. 막상 하려니 쑥쓰러운지 큼큼대는 매버릭이 너무 귀여워.
"아씨...나중에 꼭 다시 할 거야. 알겠지?"
"알았으니까 빨리."
아이스의 재촉에 매버릭은 급한대로 아이스의 왼손 약지에 키스하며 말했어. 아무것도 없으니 어쩔 수 있나.
"사랑해, 톰. 나와 결혼해 줘."
아이스는 대답 대신 몸을 던져 매버릭을 와락 끌어안았어. 둘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데굴데굴 구를 만큼.
"뭐야, 너. 대답은 안 하고."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아이스는 장난기 가득하게 웃으면서 매버릭의 얼굴 곳곳에 키스했어. 이렇게 해맑게 웃는 건 처음봐서 애틋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겠지. 왜 진작 이렇게 못해줬을까. 난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넌 내가 모르는 곳에서 울었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넌 오로지 행복하기만 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아이스, 네 믿음에 보답할게.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내가 얼마나 너한테 미쳐있는지 평생에 걸쳐서 증명할게. 사랑해, 톰. 내 하늘과 맞바꿀만큼.
매브아이스
슈슈시니어
슈슈와 시니어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라 삼형제 모두 카잔스키 성만 이어받음
그리고 아이스를 만나기 전의 매버릭은 굉장히 냉소적인 성격이었음
ㅈㅇㅁ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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