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haep.club/549182495
Code 0e40
view 590
2024.07.08 21:58
약간 수정재업


*











"좋아해."



그것 참 담백한 고백이었다. 군더더기라곤 없는 간결한 한 마디. 너무 고루해서 그 말을 뱉은 주인처럼 재미없을 정도로 정석적인 고백.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미안. 넌 내 취향이 아니라서."



왜냐하면 매버릭은 그가 제게 고백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해는 금물, 딱히 매버릭이 눈치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명색이 Ice-cold, no mistake라는 양반이 매버릭 앞에서만 묘하게 삐걱댄다는 건 그들이 함께 있는 걸 목격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매버릭은 유년 시절 탓인지 누가 자기를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정도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감정 표현에 서투른 뻣뻣한 도련님의 항상 어딘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호감 표시 따위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딱딱해 보이는 얼굴에 안 어울리게 애들같은 미소까지 띄우고 자꾸만 뭔가를 해주지 못해 안달이던 그의 호의가 부담스럽고 떨떠름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충분히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매버릭은 내심 그 시기가 어느쯤일지 속으로 가늠해보기도 했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 지 조금 고민해보기도 하고.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여라도 울면서 붙들고 늘어지거나 포기 못하겠다고 징징거리면 곤란하니까. 그러나 그런 걱정은 전부 다 기우에 불과했다.



"그래,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시간 내 줘서 고마워."



?



이게 다인가? 톰 카잔스키는 살짝 씁쓸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미련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방금 고백을 거절당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했고 또 담담해보였다.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그는 그의 그 담백하기 짝이 없는 고백처럼 실연도 심심하게 받아들였다. 혹 도련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혀 원치 않은 돌발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닌가 넘겨짚었던 자신이 우스워질 정도로.



그리고 그 후로 그는 더 이상 매버릭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하루아침에 자취를 싹 감출 수 있나 싶을만큼 말이다. 매버릭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그럴 만 하다고 납득했다. 누구라도 자기 고백을 거절한 사람이랑 마주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머리로는 이해를 했는데 이상하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약간의 헛헛함도 같이 느꼈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찾아나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찾아서 뭘 한단 말인가. 최소한 그와의 인연을 잘라낸 게 자신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묘하게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간혹가다 한 번씩 먼 발치에서 보게 되는 그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끔하기만 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 어디에서도 실연의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지겹도록 같이 붙어다니는 슬라이더 놈과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웃음이 그칠 만 하면 다시 웃음보가 터지는 게 보였다. 매버릭은 그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이를 바득 갈았다.


하지만 맹세코 그가 가는 곳을 따라가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펍에서 마주친 건 100% 우연이라는 말이다. 사실 마주쳤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저 쪽은 이 쪽의 존재를 눈치채지조차 못한 것 같았으니까. 오늘은 그 요상하게 생긴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았다. 낯가죽은 번드르르하게 생겼으니 여자가 끊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식상하지만 오늘도 그의 곁에는 금발의 몸매가 늘씬한 미녀가 붙어있었다. 매버릭은 술을 홀짝이며 그 꼴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나한테 고백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를 끼고 즐기고 앉았어? 매버릭은 지금 눈앞에서 능숙하게 여자를 상대하고 있는 톰 카잔스키의 꼴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저한테 했던 고백의 무게가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이었음에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스맨의 옆에는 여자가 한 명 더 달라붙었다. 이번에도 늘씬한 금발 미녀였다. 얼씨구, 완전 금발 킬러로구만.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가 아니라 톰 '바람둥이' 카잔스키로 불러 드려야겠어. 매버릭은 앞에 놓인 보드카를 스트레이트로 원샷했다. 왠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끽해야 맥주 한 병이 주량인 매버릭이 연거푸 보드카를 들이켰으니 곧 고개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매버릭은 술에 취해서 잔뜩 풀린 눈으로 고개를 들어 다시 톰 카잔스키를 보았다. 어느새 그의 곁에는 양 옆에 있던 여자들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뭐지? 그는 언제나와 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홀로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좀 외로워 보였다고 하면 착각일까. 그것도 잠시 또 그에게 수작질을 거는 인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남자였다. 누가 봐도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게 분명해 보였는데 그는 성의 없이 몇 번 거절하는 것 같더니 이내 옆자리를 허용했다. 매버릭은 순간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들을 지켜보느라 옆에서 플러팅이 들어오는 것도 그냥 손을 휘휘 저어 쫓아내버렸다. 까만 머리의 놈팽이가 뭐라 주절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간간히 웃어주었다. 저렇게 웃음이 헤픈 녀석이었나? 사실 그건 자조적인 웃음이었지만 그걸 매버릭이 알 턱이 없었다.


아이스는 옆에서 신나게 떠드는 남자의 말을 반쯤은 그냥 흘리고 있었다. 아이스가 그 남자를 옆에 앉도록 허락해준 것은 오로지 그가 흑발에 녹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비록 누구처럼 보석같이 영롱한 녹색 눈동자는 아니었지만.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그 신록의 눈동자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빛의 고리 또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아이스는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누구도 그를 대신하지는 못할 테니까. 질척거리는 여자들을 정중히 돌려보내고 나서 드디어 맘 편히 술 좀 마시려나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또 찾아온 불청객에 반쯤 포기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자신에겐 느긋이 고독을 즐기거나 슬픔을 달랠 시간 같은 건 주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느낌에 아이스는 술이 아닌 얼음물이나 성마르게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원래 술이 쎈 편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오늘은 유독 취하지 않았다. 그와의 추억을 반추하기 때문일까. 매버릭, 그에겐 아무 의미 없는 시간들이었을지 몰라도 아이스에겐 그것조차 소중한 추억이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성가셔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고백해봤자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점점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져가는 제 마음을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지만 속이 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고백하고 나니 한결 후련하긴 했다. 그것이 이 미련한 마음을 접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한시도 놓치지 않고 뚫어져라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매버릭은 그들이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했다. 다행히 그런 추태는 부리지 않았지만 손 안의 술잔은 힘을 조금만 더 줬다간 깨져버릴 듯 했다. 술잔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펍에서 같이 나간 둘이 뭘 하겠는가. 자연스레 상상되는 장면에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옆에 붙어있던 놈이 체구가 작았으니 카잔스키 그 놈이 박으려나? 아니면 그딴 거 상관없이 박히는 게 취향이려나. 그 금욕적인 얼굴을 한 톰 카잔스키가 아래에 깔려서 다리를 벌리고 신음하는 게 잘 상상되지 않았지만 다른 남자의 밑에서 쾌락에 달아오른 얼굴로 울 거라는 상상만 해도 참을 수 없이 불쾌해졌다. 스스로도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매버릭의 뇌는 알코올로 찌들어 있었다. 즉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자리에서 담배를 족히 한 갑은 피운 것 같았다. 담배만 피우고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 이름모를 남자는 도통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이스는 이 남자와 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직 매버릭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원나잇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아이스는 정석대로 연애를 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저 외양이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어 잠시 옆자리를 허용한 것 뿐이지 그 이상은 없다. 그렇게 술을 들이부었는데도 아이스의 정신은 맑고 또렷했다. 좋게좋게 말로 해서 못 알아듣는다면 무력행사를 해서라도 쫓아버릴 의향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때 별안간 누군가 난입해 아이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이스는 그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매버릭...?"



다짜고짜 난입해들어온 매버릭은 이 새끼랑 잘 거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이스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매버릭이 인사불성인 상태임을 알아채고 그를 진정시키며 한편으론 고개짓으로 제 옆에 있던 남자를 쫓아냈다. 매버릭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스는 일단 그런 일 없다고 매버릭을 달랬다. 그러자 잔뜩 풀려있는 눈을 느릿하게 몇 번 깜빡이던 매버릭은 고개를 꾸닥꾸닥 끄덕였다. 그러더니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휘청이며 쓰러지려는 걸 아이스가 간신히 받쳐안았다.



"매버릭, 매버릭? 정신 좀 차려 봐."

"으음......"



매버릭의 입에서 술냄새가 풀풀 났다. 술도 약한 애가 얼마나 마신 건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의아하기도 한 한편 이런 상황에서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속없이 설레이는 자신이 바보같아 실소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필사적으로 피해 왔던 그가 너무나 반갑고 이렇게라도 닿을 수 있어 감사할만큼 좋았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정신도 못 차리니 이만하면 그를 데려다 줄 핑계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아이스는 매버릭의 팔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별 것 아닌 접촉에도 마음이 붕 떠 술에 쩔어 축 늘어진 몸을 부축하면서도 전혀 무거운 줄을 몰랐다. 매버릭의 관사로 향하는 길에 매버릭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꼬대처럼 너어...그러면 안 되는 거야...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아이스는 그걸 단순한 술주정이라 생각해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매버릭이 말하는 그 '너'가 자신인 줄도 모르고.


어찌저찌 매버릭의 관사 앞에 다다른 아이스는 그의 주머니를 전부 뒤져 열쇠를 찾아냈다. 아무리 아이스가 체력이 좋아도 이쯤 되니 힘들었다. 그래도 매버릭을 현관에 내팽개쳐놓고 갈 수 없었던 아이스는 다시 그를 들쳐메고 침실을 찾았다. 매버릭의 겉옷을 벗겨주고 침대에 고이 눕힌 뒤 깔끔하게 돌아서려던 아이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잠든 그의 머리를 한 번 쓸어보았다. 이 정도는 고생한 값으로 쳐 줘. 그리고 일어섰다.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런데 그 때 익숙한 체온이 또 아이스의 손목을 탁 낚아챘다.



"매버릭?"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는 불안정하게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어디 가아..."

"매버릭, 일단 누워."



칭얼거리는 투로 말하는 걸 봐서는 안 눕겠다고 고집부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눕혀주는 손길에는 또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그러더니 여전히 게게 풀린 눈으로 아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어...어떻게 그럴수가 있냐...?"



굉장히 서운하고 흡사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다. 아이스는 의문에 빠졌다. 술 취한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게 바보같은 짓이라는 걸 알지만 허투루 듣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아이스가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때 매버릭이 바로 그 해답을 주었다.



"내가 좋다며...날 좋아한다며......"

"...매버릭?"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해...?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였어...? 벌써 식은 거냐고......"



...세상에. 이거 내가 설레발치는 거 아니지. 이거...그런 뜻 맞지?



"대답 좀 해 봐...톰 카잔스키 이 개자식아...내가 좋댔으면서...얼마나 됐다고 남자여자 가리지 않고 놀아나...? 이런 씨발......"

"그런 적 없어, 매버릭."

"거짓말하지 마!! 내가 다 봤는데......"



아이스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막으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난 게 불만이라 이거지. 맞잖아. 제발 맞다고 해줘, 피트 미첼.



"매버릭,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변한 적 없어."

"......진짜?"

"응. 근데 나 네 취향 아니라며."



애처럼 얼굴이 활짝 피다가 짓궂게 덧붙이자 급시무룩해지는 꼴이라니. 너 정말 내가 아는 매버릭이 맞는 거니. 왜 이렇게 귀여운데.



"그건...그 때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는 게 딱 어린아이가 잘못해놓고 뭐라 변명할 말을 찾는 모습이라 아이스는 결국 못 참고 푸스스 웃고 말았다.



"생각이 바뀌었어?"

"......"

"아님 취향이 바뀌었어?"

"......"

"이도저도 아니라면 난 이만 가야겠다-"

"자, 잠깐만!!"

"왜?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말하면서도 놀라웠다. 아이스 스스로도 자신이 매버릭을 상대로 이런 말을 웃음을 머금고 할 수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왕 말이 터진 김에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취중진담이라는 말. 그게 진짜이길 지금 이 순간만큼 간절히 바라본 적이 없었다.



"...싫어하는 건...아닌데......"

"그럼?"

"...몰라...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는 매버릭은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직은 좀 이른가. 그렇지만 이런 기회가 두 번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스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그럼 나도 너 그만 좋아해도 돼?"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까지 매버릭의 진심을 엿보고 싶었다. 설마 그 말에 그의 가슴이 철렁했으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그러지 마..."



매버릭은 간절하게 아이스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 애처로운 모습에 아이스는 순식간에 모든 전의를 상실했다. 제 귀에 듣기 좋은 소리 한 번 듣자고 그를 몰아붙이는 짓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는 피트 매버릭 미첼에게만큼은 한없이 약해졌으니까. 애초에 그가 저와 같은 마음으로 저를 좋아해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건 가망이 없는 일이고 과욕이기 때문에. 하지만 적어도 저를 싫어하지는 않고 옆에 있어주기를 바란다는 것만은 확실해졌으니 아이스는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게다가 자기를 계속 좋아해달라지 않는가. 뻔뻔하고 이기적인 주문일지라도 아이스는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알았어, 안 그럴게."

"진짜지...?"

"그래, 약속."



그제서야 안심하는 듯한 매버릭을 보고 아이스는 설령 내일이 되면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꾼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냥 오늘밤의 이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아이스는 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항상 소박하기 그지 없었다. 매버릭의 다정한 목소리, 눈빛, 손길 같은 것들. 그것들이 제 몫으로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을 때는 크게 낙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모든 것을 포기했었던 지금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하룻밤의 꿈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매버릭이 제 침대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여기 내 옆으로 와."



여전히 알딸딸하지만 제법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하는 매버릭에 아이스는 웃으며 그가 지정한 곳으로 가 앉았다.



"이제 자자."



응? 헤헤 웃으며 같이 자자고 자신을 끌어당겨 눕히는 매버릭의 행동에 아이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매버릭의 손길에 섹슈얼한 의도가 없다는 건 알겠으나 이러다간 내일 술이 깬 매버릭한테 눈 뜨자마자 내쫓기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것도 곧 제 몸을 꼭 끌어안아오는 매버릭에 사르륵 녹아버렸지만.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매버릭이 어찌나 귀여운지 아이스는 처음 느껴보는 진한 행복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걸로 하자.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하겠지. 둘은 그렇게 옷도 안 벗고 어린애들처럼 서로 꼭 껴안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이스보다 먼저 눈을 뜬 매버릭은 소리없는 내적 비명을 질렀다. 첫째로 코 앞에 보이는 아이스의 얼굴 때문에 영혼이 가출할 만큼 놀랐고 뒤이어 촤라라락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제 술주정 때문에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틀린 말 한 건 또 하나도 없어서 더 골치가 아팠다. 모른다고 답하긴 했지만 자신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답은 뻔했다. 거기다 펍에서 이를 박박 갈며 했던 생각들까지 더해지면 이건 그냥 빼도 박도 못하는 거였다. 더 문제인 건 지금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기분이 나쁘긴커녕 피부로 느껴지는 따끈한 체온이 상당히 흡족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술 처먹고 사고쳤나 해서 기겁했는데 곧 둘 다 멀쩡히 옷 다 입고 있는 거 보고 안도하는 동시에 묘한 아쉬움이 드는 걸 깨닫고는 경악했다.



"으음..."

'아니야! 눈 뜨지 마! 더 자라고!!!'



그러나 매버릭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아이스는 졸린 눈을 비비더니 이내 눈을 반짝 떴다. 순간 똑바로 마주치는 푸른 빛이 감도는 보석같은 회색 눈동자를 보고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에 매버릭은 강렬한 낭패감을 느꼈다.



-시발 어떡하지, 나 진짜 좆된 거 같은데.



그들의 벚꽃잎 흩날리는 봄날같은 연애는 이제 막 싹을 틔우려 하는 참이었다.

















매브아이스
댓글 작성 권한이 없음
등록된 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