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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3 09:42
ㅈㅇ





시간이 갈수록 아이스는 점점 더 빠르게 고립되었어. 매버릭의 옆에 있지만 그의 친위대나 다름없는 황실 기사단과는 당연히 어울릴 수 없었을 뿐더러, 똑같이 전쟁포로로 끌려온 노예들 사이에도 속할 수 없었지. 아이스의 존재는 매버릭의 측근들에게는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노예들에게는 자기들과는 다른 특별취급을 받는 자로 느껴졌으니까. 그도 그럴것이, 그곳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 흉터를 갖고 있지 않은 노예는 아이스 외에는 아무도 없었거든. 아이스는 제게 낙인형을 주지 않은 매버릭을 이해하지 못했어. 분명 제게 낙인을 찍으려 데려간 거라고 생각한 곳에서도 애꿎은 사람만 잡았고 말이야. 그 후로도 그는 딱히 제게 낙인을 찍을 생각이 없어 보였어. 그리고 매버릭의 그 애매한 처사는 되려 아이스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철저히 혼자가 되도록 하는 데 크게 일조했지. 만약 이 모든 게 다 계산하에 이루어진 거라면 정말 교활하기 짝이 없다 느낄 정도로. 온 사방이 적이야. 어느새 아이스는 품에 칼을 안고 잠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지. 그러던 어느날이었어.



"......"



저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어. 언젠가 한 번은 어떤 식으로든 일이 터질 것이라는 것도. 아이스는 조용히 지나치려 했지만 그들은 길을 막고 비켜주지 않았어. 일전에 매버릭의 앞에서 대놓고 창피를 당한 기사단장을 필두로 평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던 놈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지. 아이스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고 말았어. 고작 저 하나를 족치려고 이렇게 많이 몰려온 것도 우습고 그렇게 자긍심 대단한 황실 기사단이라는 놈들이 하는 짓이란 게 결국 질낮은 시정잡배들이 하는 짓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에 작게 실소가 나왔지.



"웃어?"



대번에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그런 것은 아이스의 안중에 없었어.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이 일이 매버릭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하는 것 뿐이었지. 여기서 그냥 한 번 당해주고 아무일도 없었던 척 넘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러면 다음에 또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어딘가 잘못 맞아서 어디 한 군데 부러진다면, 그래서 명령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그건 곤란해. 매버릭이 망가진 장난감의 형편을 봐 줄 거라 생각되진 않았거든. 그는 잔인하고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지. 비극에 가까운 희극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또한 제 부하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애착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어. 흠... 아이스는 닉과 크리스를 위해서라도 매버릭이 자신에게 흥미를 잃지 않을 만한 쪽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었어. 그 말은 즉 매버릭의 변덕스럽고 어린아이같은 성격에 도박을 걸어볼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었지. 생각을 마친 아이스는 이내 말없이 검을 손에 쥐었어.




*




"아하하하하!!!"



다음 날, 2황자궁에서 높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어. 그 앞에 도열해 있는 이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진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지. 그들은 저마다 각자 하나씩 얼굴에 시퍼런 멍자국을 달고 있었어. 개중에는 다리를 절뚝이는 이도 있었지. 그리고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이스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고 한 쪽에 묵묵히 서 있었어.



"하하...하하하...그래, 그랬단 말이지."



한참을 웃던 매버릭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어. 그건 정말 너무 웃겨서 못 참겠다는 웃음이었고 도저히 자신의 직속 부하들이 당했다는 (그것도 1대 다수로) 소식을 접한 자의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어.



'역시...변칙적이야.'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어. 지금 이 상황을 재밌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식 기사도 뭣도 아닌 자신이 제 소유의 황실 제 2기사단을 반쯤 죽사발을 내놨다는 것에 조금이라도 자존심 상해 한다면... 감히 망국의 포로 따위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에 괘씸해한다면...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매버릭이 제 기사들 편을 조금이라도 들 마음이 든다면 제 목숨은 오늘로 끝이었지. 도박. 말 그대로 도박에 가까웠어. 저들의 인생과 제 인생을 장난스럽고 잔인한 어린 폭군의 손에 올린 거지. 그건 실로 엄청난 모험이었어. 매버릭의 웃음소리가 멈추자 금세 분위기는 살얼음판처럼 차갑게 얼어붙었거든. 매버릭은 무심하게 입을 열었어.



"기사단장."

"예, 예! 전하!!"

"네 잘못이 뭔지 아느냐?"

"그것이......"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제발 한 번만 용서를...!"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턱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하는 매버릭의 태도는 지극히 심드렁했어.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다른 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지.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전하!!"

"전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애원이 들리지도 않는지 매버릭은 이내 무미건조한 어투로 처벌을 내렸어.



"기사단장은 참형에 처하고 몸뚱이는 짐승이 뜯어먹도록 들판에 내다버려라. 나머지는 다들 오른손을 자르고 국경 밖으로 내쫓아. 이 시간부로 제국민의 신분증명서류를 모두 말소한다."



마침내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어. 그 말은 즉 아이스가 이겼다는 뜻.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한 처사였어. 솔직히 말하면 한 대도 못 맞히고 당하기만 한 건 저 쪽인데 참형이라니. 게다가 검사가 오른손을 잘리면 굶어죽으란 소린가? 거기다 신분증명서까지 없애버리면? 사람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매버릭의 성정이 또 한 번 치를 떨 만큼 잘 느껴지는 순간이었지. 제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기고 나서도 뒷맛이 찝찝했어.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미미하게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지. 그 와중에 기사단장은 철갑옷을 입은 다른 기사에게 붙들려 나가면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애원했어. 당연하지. 그들 중 사형을 언도받은 건 그뿐이었으니까.



"전하, 전하! 살려주십시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 꼴을 한심한 듯 지루하게 바라보고 있던 매버릭은 이윽고 큰 선심 쓴다는 듯 입을 열었어. 거기엔 딱히 숨길 의도도 없어 보이는 짜증이 같이 묻어나고 있었지.



"넌 지금 네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모양인데...나는 지금 네게 비겁한 짓을 한 죄를 묻는 게 아니다."

"그게, 무슨..."

"네가 이기기만 했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넌 일전에도 별다른 근거없이 이 자가 위험할 것이라 판단했고, 이번에는 여럿이 몰려가 집단으로 폭행하려다 되려 호되게 당했지. 자신은 물론 상대의 역량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를 내가 어디까지 참아줘야 한단 말이냐?"



그 서릿발 같은 말에 기사단장이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어물어물 입만 벙긋거리자 매버릭은 그만 데려가라는 듯 성가신 표정으로 까딱 고갯짓했어. 뒤늦게 다시 애걸하는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하게 멀어져갔지.


그리고 아이스는 매버릭의 이상한 처벌기준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그럼 기사단 전부를 이끌고 와서라도 반 죽여놓았으면 그들의 편을 들어줬을 거라는 건가? 그 사이에 조금의 도덕성도 끼어들 자리가 없어도 무조건 승리했다면 유능하다고 인정했을 거란 말인가? 거기에 얼마만큼의 수적 열세가 있어도? 문득 아이스는 최후의 전투, 그 날이 떠올라 입 안쪽 여린 살을 꾸욱 즈려물 수 밖에 없었어. 중과부적. 해치우고 또 해치워도 새카만 개미떼마냥 아득하게 평원을 뒤덮던 제국군.



"흠, 전에도 봤지만 정말 실력이 좋단 말이야."



아차, 잠시 옛 기억에 매몰되어 넋을 놓을 뻔했어. 어느새 죄인들은 모두 끌려나가고 주위에는 시종 몇과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만 남아있었지. 아이스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어.



"...과찬이십니다."

"아니, 덕분에 아주 손쉽게 기사단의 썩은 부분을 도려냈어."



허, 생글생글 웃는 그 얼굴을 보고 아이스는 그제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던 그가 제 편을 들어주고 그걸 빌미로 기사단원들을 대폭 물갈이했을 거란 걸 깨달았지. 실컷 이용당한 꼴이지만 결과만 보면 아이스에게도 크게 나쁘지 않았어.



"아, 그럼 내친김에 작은 선물을 하나 줄까."



그 말에 아이스는 혹시나 닉과 크리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두근거렸어. 바로 이어진 매버릭의 말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지만.



"재봉사를 불러. 넌 검은 옷이 안 어울린다. 무슨 자객도 아니고... 그래, 저번에 입었던 것처럼 흰색이 잘 어울리겠군."



저번에 입었던 거라면 포로수용소에 입고 갔던 것 말이지... 사실 흰 옷이든 검은 옷이든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흰색 제복은 지난 번 일로 약간 트라우마가 된 상태였어. 옷감의 재질과 망토에 새겨진 황실의 문양으로 자신을 판단하던 여인. 그 여인은 지금쯤 살아있을까. 잔인한 덫에 걸려 혀까지 뽑혀야 했던 불쌍한 여인. 물론 아이스도 지금 제가 한가롭게 다른 누군가를 동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알아. 이 미치광이 황자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렀다간 닉과 크리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래, 명분거리가 되라면 되고 인형놀이 하듯 곱게 차려입은 인형이 되라면 되자. 그걸로 닉과 크리스가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다면, 오늘도 아이스는 그걸로 족했어.











매브아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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